2025. 4. 4. 10:17ㆍ기린 Life
공익과 합의를 추구하는 변호사, 윤영환

윤영환 변호사님은 2014년 중재과정에서 만났습니다. 이후 페이스북 친구가 되어 대표로 활동하는 이주민단체 “친구”의 소식을 접하다, 십년이 흐른 후 대림동에 있는 단체의 사무실에서 반갑게 만났습니다.
- 10년 만이네요. 당시 저는 회사생활의 고민으로 중재과정을 들었는데, 변호사님도 중재과정을 들을 때 이유가 있었나요?
이주민단체 ‘친구’를 2012년 설립해서 그때가 초기였는데, 이러 저런 이유로 듣게 되었어요. 이주민단체는 외국인 문제가 사회 갈등 요소일 수 있는데,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예방하는 게 중요하고, 문제가 생겼을 때 갈등을 해결하는 게 중요해서 그런 부분에 대해 관심이 많았어요.
2012년 설립 당시에는 법률상담 위주의 작은 사무실이었는데, 2014년에는 좀더 활동을 확장하려고 카페를 만들었어요. 사람들이 많이 만나서 교류해야 이주민에 대한 편견도 깨지고 서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지요. 지하철역 가까운 곳에 공간을 새로 구하고 공사를 해서 4월 중순에 오픈하려고 했는데, 4월 16일 세월호 일이 터지면서 오픈을 미루었다가 5월 16일 즈음 개업을 했어요. 그때 되게 힘들었어요. 한쪽에서는 돈을 벌고 다른 한쪽에서는 카페 공사로 돈을 써야 하는데, 갑자기 돈이 안 벌렸어요. 40대 초반이니까 젊은 혈기에 엄청 몰입해서 일을 벌였는데, 힘들더라고요. 스트레스 확 받았지요.
그럴 즈음 중재 3일 코스가 열렸어요. 그걸 마치면 다음 집중 코스로 갈 수 있는 교육이었어요. 힘들어서 갔는데 듣고 나서 많이 편해지더라고요. 약간 이상하지만, 중재과정을 들으면서부터 일이 잘 풀렸어요. 그 후부터 지금까지 변호사 업무나 단체 활동이 전체적으로 우상향 성장했어요. 좋은 후배들도 계속 들어왔고요.
- 이주민단체 활동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변호사를 한 10년 정도 하니까 매너리즘에 빠졌어요. 내가 왜 변호사를 하려고 했는지 다시 생각했지요. 고시공부를 시작할 때 변호사가 되면 외국인 인권문제나 탈북민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조금씩은 하고는 있었는데, 본격적으로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후 사람들을 모아 조직을 만들고, 외국인들이 제일 많이 사는 현장에서 일을 하는게 좋을거 같아서 이곳 대림동으로 왔어요.
- 단체가 사단법인이네요.
사단법인 설립은 박근혜 정부때 했어요. 정부는 이주민을 지원하는 일을 일종의 사회복지로 봐서 정권하고는 큰 상관이 없어요. 최근 오세훈 시장도 이주민이나 외국인 문제에 관심을 많이 가져서 이주민 사업이 더 커졌어요.
- 어떻게 이주민에게 관심을 갖게 되셨는지요?
사법연수원 다닐 때 북한 기아 문제와 이주노동자 인권문제가 심각해서 그때부터 자원봉사를 했어요. 저는 88학번으로 서울 법대에 들어가서 학생운동을 하다가 졸업 후 몇 년 뒤에 고시 공부를 시작했는데, 제 내면에서 어떤 타협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변호사가 되더라도 공적인 활동을 하는 변호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현재 제가 속해 있는 법무법인도 공적인 활동을 해온 곳이에요. 저희 법무법인에는 인권 변호사나 민변 소속 변호사들이 많아요. 소속 변호사가 40명 좀 넘는데 30명 이상이 민변에서 활동하고 있어요.
- 변호사를 언제 시작하셨나요?
2002년에 시작해서 24년째 하고 있어요. 저는 27살에 고시 공부를 시작했어요. 학생운동 하다가 힘들어서 그만두고 방황을 좀 했죠. 이념이 무너지던 시대여서 뭔가 대안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교육학과에도 가려고 하고, 불교 등 종교에도 관심을 가지고 명상도 배웠어요. 사람이 바뀌려면 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인간의 본질을 깊이 들어가면 종교와 더 맞닿아 있는 것 같더라구요.
아버지가 목사셨는데 신학도 공부해보고 싶어서 진보 성향의 한신대 부설기관에서 1년 동안 목회상담 공부를 했어요. 그런데 너무 도그마틱해서 제 성격에 안 맞었어요. 도그마(맹목적 신념)가 싫어서 학생운동도 힘들었는데 기독교는 더 하더라구요. 이건 아니다 싶었지요.
그러던 차에 주변을 보니 학생운동을 하다가 노동현장에 갔던 선배들이 현장을 나와서 고시 공부를 하고 있었어요. 그들을 보고 나도 고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연애하다 차이고 나니 이러다 장가도 못가겠다는 싶기도 했지요. 사회통념상 30살이 넘으면 돈을 벌어야 되잖아요. 그러려면 직업이 필요한데 이거 저거 다 해봤지만 할 게 없었어요.
그래서 고시를 보면서 거기서 돌파구를 찾기로 하고 공부를 시작했는데, 법 공부가 너무 재밌었어요. 뜬구름 잡는 이념만 계속 쫓아다녔는데 법은 굉장히 현실적이고 합리적이었어요. 현실을 이성적으로 조정하기도 하고요. 법의 핵심 원리가 이익 형량인데, 공평, 이익 형량, 이런 게 너무 재밌더라고요. 모든 게 다 벽에 부딪힌 상태였는데, 현실을 설명하는 여러 가지 이론들과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배운 것들이 통합되면서 공부가 굉장히 재미있었어요.
공부 3년 만에 고시에 합격했어요. 학부 때 공부 안 한 거 생각하면 빨리 된 편이에요. 사실 할 게 없어서 공부만 했데, 너무 재밌었던 거죠. 학부 때는 왜 그렇게 싫었나 모르겠어요. 밖에서 민주화운동에 대한 압력이 크니까 그쪽으로 확 몰입했던 것 같기도 하구요. 학부 때부터 고시 공부한 동기들은 7~8년 먼저 법조계에 들어가서 이제는 대법관, 헌법재판관을 하고 있지요.
변호사가 되고 나서는 바로 법무법인 ‘덕수’에서 일을 시작했어요. 다른 대형 로펌보다 월급이 적어도 덕수에서 일하고 싶었어요. 아예 다른 곳과는 비교도 안 했어요. 면접 보고 바로 출근해서 지금까지 다니고 있어요. 제 성향이 리버럴한데, 여기는 변호사 일이 짜여져 있지 않고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 있어서 저한테 잘 맞았어요.
- 서울법대 들어가셨으면 엄청 공부를 잘 하셨겠네요. 서울 법대를 다니면서 운동권으로 빠지는 사람과 고시 쪽으로 빠지는 사람의 특성은 어떻게 다를까요?
입학해서 어떤 선배를 만났느냐도 중요하고 성향도 있겠죠. 그러나 학생운동을 한 사람은 소수이고, 대부분은 3~4학년 때 공부를 바짝 해서 학교 다니면서 붙기도 하고, 보통은 졸업 후 3~4년 안에 붙지요. 저처럼 방황하고 군대 갔다 오고 한 사람들은 조금 늦게 되고요. 해도 안 되는 사람이 있으니 운도 따르는 것 같고요.
- 학부 때는 공부를 안 했지만 이것저것 경험해 보고 나서 법 공부를 하니까 되게 재미있었다는 게 흥미롭네요.
법 공부가 현실적이었던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분쟁이 났는데 이걸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한 이치가 들어있었어요. 법이라는 게 결국은 사회생활과 거래 등을 다루니까 사회 곳곳을 법이라는 규범을 통해 들여다보는 거지요. 이전에 하던 사회개혁이나 혁명이 머릿속으로만 생각했다면, 법은 현실 속에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보여주니까 생각이 더 구체화되었고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수단들을 얻은 것 같았어요. 또 돈도 벌 수 있으니까 그걸로 이런 저런 일도 할 수 있을 거 같았구요.
- 비폭력대화에 큰 영향을 준 간디도 변호사였더라고요. 비폭력대화는 언제 배우기 시작하셨나요?
과천에서 공동육아할 때 특강을 들으면서 처음 접했어요. 애들 어릴 때니까 한 20년 되었네요. 대화를 배운 적이 없으니까 되게 신선하더라고요. 사람을 이해하는 방법도 조금 알게 되었구요.
그때 흥미를 느껴서 후배 변호사들을 모아 NVC1을 들었고, 박성용 목사님이 계신 비폭력평화물결 쪽 교회도 6-7년 다녔어요. 거기서 하는 회복적 서클도 관심있게 배웠어요. 결핍이 있으면 뭔가를 찾게 되잖아요. 대화를 잘 못하니까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 싶어서 관심을 가지게 된 것 같아요.
그러면서 배운 걸 좀 더 심화해 보고 싶던 차에 중재 과정이 열렸어요. 그게 2014년이고, 중재 1년 과정이 시작된 두 번째 해인가 그랬어요.
정확히 중재교육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후 의뢰인이 찾아오거나 이주민 상담을 하면 상담이 별로 힘들지 않았어요. 상담을 힘들어하는 변호사들이 있는데, 저는 여러 가지 힘들고 복잡한 생각을 가지고 오는 의뢰인에게 팩트를 정확히 정리해 주고, 거기에 엉켜있는 감정을 공감해 주고, 원하는 게 뭔지 확인을 해요. 거기서 연결이 되죠. 현재 상황에서 원하는 게 뭔지 확인을 하면 그 다음에는 갖고 있는 증거나 객관적인 자료, 법적인 기준을 가지고 해결방법을 찾아요.
법적인 시스템 안에서 해결해야 되니까 법률 정보를 주고, 때로는 무조건 다 수용할 수 없으니 설득해야 할 때도 있어요. NVC는 시작 단계에서 도움이 많이 되고, 재판등 모든 단계에서도 NVC 원리가 도움이 많이 되요. 중재기술도 도움이 많이 되지요. 재판을 하면 싸우게 되는데, 저는 합의나 화해 비율이 다른 변호사보다 좀 높은 것 같아요.
재판 후 한참 있다가 상대방이 찾아오기도 해요. 최근에 제 의뢰인의 입장에서 중간 지점을 찾아서 상대가 잘못한 건 돈으로 보상을 받고 대신 우리가 비밀을 지켜주기로 하면서 조율하는 과정이 있었어요. 서로 원하는 것을 확인하고 방법을 찾는 거죠. 이런 일은 재판 중에 하기도 하고, 재판 외에서도 있을 수 있어요. 당사자들의 동의하에 제가 만나서 얘기를 하다 보면 해결될 때가 있어요. 제 의뢰인에게도 원하는 만큼은 현실적으로 어려우니 조금 양보하면 얻고 게 있다고 설명하고, 상대방한테도 그의 입장을 이해해 주면서 이렇게 하면 서로에게 좋을 거 같다고 말하면 설득될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조정이 되는 거지요. 법원에서는 합의안하면 손해라면서 억지로 시키기도 하는데. 저는 자발적인 합의를 유도해요. 물론 이미 마음이 상해서 전쟁터로 나오기 때문에 그리 많지는 않아요.
이렇게 저처럼 훈련을 받은 변호사들은 약간 다르게 접근할 수 있어요. 변호사는 법적으로 유불리를 아니까 법적인 거는 당연히 들어가지만, NVC로 마음을 연결하면 좀 더 통합적으로 갈등을 조정할 수 있게 되는 거 같아요.
- 아, 그러시군요. 변호사님은 주로 어떤 사건을 다루시나요?
일반 민사소송을 많이 하고, 가사소송도 자주 해요. 민사는 회사나 개인의 거래, 부동산, 저작권 등 주로 돈과 관련된 거죠.
- 얼마전 간디자서전을 다시 읽었는데 새롭게 다가온 구절이 있었어요. 젊은 시절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가서 처음으로 맡은 사건에서 합의를 이끌어 내면서 간디가 큰 교훈을 얻었더라구요. 소송을 통해 재판으로 가면 비용과 시간상 서로 피해가 너무 크니까 합의를 이끌어내는 게 변호사의 중요한 역할이라구요.
중요하죠. 그래서 저는 소송보다 합의를 선호해요. 경력이 쌓이니까 합의가 될 수 있는지 없는지 감이 와요. 합의를 할 수 있으면 합의하는 게 서로에게 이익이에요. 저한테 돈을 주는 의뢰인에게도 이익이지요. 합의를 해도 잃을 수 있지만, 소송을 해도 질 수 있고, 또 소송해서 이긴들 사람을 잃게 되니 적정선에서 서로의 명예나 마음을 지키면서 합의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건 변호사의 중요한 덕목인 것 같아요.
- 중재교육을 통해서 그런 마음과 스킬이 향상되신 걸까요?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의식하면서 중재의 원리를 쓴 건 아니지만, 제가 일하는 영역에서는 갈등해결과 중재가 많이 필요하니까 배운 것들이 많이 적용되는 것 같아요. 주변 동료들이 제가 그런 걸 잘 한다고 해요. 또 의뢰인들 얘기를 잘 들어주고 잘 소통한다는 평가도 많이 받는 편이죠.
제 성향이 원래 그럴 수도 있는데 그쪽에 관심이 있다보니 나름대로 훈련을 한 거죠. 저처럼 이쪽에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훈련한 변호사가 그리 많지는 않지만, 지금 우리 단체에서 일하는 변호사님도 비폭력대화를 배웠고 현재 ‘갈등해결과 대화’ 단체의 이사이기도 해요.
- 얘기를 듣다 보니까 NVC는 변호사들한테 굉장히 필요한 것 같네요.
맞아요. 그래서 초기에는 후배들한테 많이 권했어요. 요즘은 연차도 있고 하니 그렇게까지는 안 하는데, 에너지가 많을 때는 팀원이나 친한 후배들을 모아서 NVC1을 같이 들었어요. 그게 팀워크에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당시 같이 했던 변호사들이 가끔 그 얘기를 해요. NVC 원리가 의뢰인들을 만날 때나 팀워크에 도움이 된다구요.
저는 팀워크를 위해서 보다는 후배들에게 그런 스킬을 키워주고 싶었어요. 좋은 거를 후배들도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죠. 그 때 같이 했던 사람들이 지금 다 저희 법인에 있고 또 같은 공익활동에도 계속 관여를 하고 있어요.
- 판사 중에도 NVC를 배우신 분이 계서서 우리 활동가들이 가정법원에 조정자로 들어가고 있고, 회복적 경찰활동을 하면서 경찰들도 배우고 있는데, 판검사를 양성하는 사법연수원에도 NVC 과정이 들어가면 좋을 거 같아요
할 수 있으면 좋지요. 사회생활과 인간관계는 결국 대화없이는 해결되지 않으니까요.
업무가 힘드실 거 같은데, 자기 관리는 어떻게 하셔요?
마음을 써야 되니까 사실 나중에는 약간 피곤한 느낌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말을 안하는 명상을 좋아해요. 또 제가 일하는 로펌의 저희 팀에는 파트너가 저 포함해서 세명인데, 저희끼리 책을 강독하기도 해요. 요즘은 신부님이 쓰신 책을 일주일에 한 번 한 시간씩 강독하고 20-30분 얘기를 나눠요. 그런 걸 안 하면 저희 업이 너무 각박해서 지치기가 쉬워요.
- 변호사님은 인간에 대한 애정과 사회 변화에 대한 뜻이 있으신 상태에서 NVC를 만나신 거 같아요.
고민들이 있었죠. 그걸 풀어가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것들을 만났는데, 그중에서 NVC는 단순하면서도 핵심을 짚어주고, 실제로 연습하면서 조금씩 변화가 느껴지기도 하니까 좋았어요. 물론 자주 놓치지만 원칙으로 돌아가는 준거점이 되어주는 게 좋아요.
- 이주민센터 일에도 도움이 되시나요?
이주민들 역시 같은 문제가 있고, 법률 상담하는 프로세스에서는 공감이 훨씬 더 중요하죠. 왜냐하면 피해 의식이 더 많을 수도 있고 위로가 더 필요할 수도 있어서 도움이 되죠. 또 저희 센터는 시민운동의 일부니까 저희 활동가들끼리의 소통에도 굉장히 중요해요. 이주민센터에서는 교육도 하고 법률상담도 하고 소송지원도 하고 있는데 NVC 원리를 하나의 원칙처럼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 재정은 어떻게 충당하시나요?
개인과 단체 후원으로 하는데, 어렵죠. 현재 공간으로 이사 오면서 돈을 많이 써서 연말에 재정 압박을 엄청 받았는데 연초에 조금 회복이 되었어요. 이곳에 상근자가 4명인데 유지하는 게 쉽지는 않죠.
- 집에서의 비폭력대화는 어떠신가요?
가족회의할 때 도움이 되요. 민주적으로 가족을 운영하려고 노력하는데, 어렵죠
- 아이들을 공동육아와 대안학교에 보내셨는데, 아이들은 어떻게 자랐나요?
두 아이 모두 12년간 의왕에 있는 청계자유발도르프학교를 다녔어요. 둘 다 대학입시는 안 했어요. 25살 큰애는 요가 강사에요. 최근 요가원을 개업했어요. 벌써 회원이 30명이라고 하네요. 22살 작은 애는 집에서 독립해서 나갔어요. 용돈 안 받고 필요한 건 자기가 벌어서 쓰고 있어요. 대학 안 가도 배움을 이어갈 수 있다면서 기후운동 같은 사회운동에 관심을 가지면서 선택해서 살고 있어요. 지금이야 20대니까 어떻게든 살겠지만 나중에 어떻게 될지 약간의 불안과 우려가 있긴 해요. 그러나 저희가 선택한 과정이고, 애들도 그렇게 살아가기로 선언하고 살고 있어요.
- 공동 육아는 어떻게 시작하셨어요?
저희 법무법인에 있는 선배 세명이 먼저 공동육아를 하고 있었어요. 큰애 5살 무렵에 공동육아가 좋다면서 권하더라고요. 그래서 봉천동에 살다가 과천으로 이사를 가서 공동육아를 시작했는데, 되게 재미있었어요. 20대 초반 학생운동 할 때나 중고등학교때 교회에서 느꼈던 그런 친밀감이 있었고, 사심 없이 뭔가에 몰입하는 게 좋았어요. 대학 졸업 후 10년간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다가 다시 좋은 사람들을 만난 거죠. 애들을 같이 키우면서 서로 이해관계 없이 만나는 게 너무 좋았어요. 애들 어릴 때는 서로 비교를 잘 안 하잖아요.
굉장히 좋은 경험이었고 행복했어요. 많지 않은 경험 중에 하나였어요. 대안학교에 가면서부터는 사람이 많아지니 사심 없는 친근함은 점점 없어졌죠. 학교에서는 서로 비교도 하고 사회적인 압력이 있으니까요. 이사회 등 여러 가지 활동을 했지만, 대안학교보다는 공동육아가 더 재밌었던 것 같아요.
대안학교에서는 애들의 몫이 더 커지고 부모들의 참여가 적어지기도 했고, 또 공동체의 갈등이 있잖아요. 공동육아도 그렇지만 대안학교는 더 좀 이성적이고 원칙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피 터지게 싸우면서 대안학교에서도 비폭력대화나 이런저런 프로그램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늘 그런 쪽에 관심을 두고 있었던 거 같아요.
- NGO 활동은 어떤 면이 보람이 있으세요?
지금 우리나라에 사는 이주민이 280만 명 정도 되거든요. 이주민이 점점 많아질수록 이로 인한 문제들이 더 나올 텐데, 이주민들이 잘 정착하고 갈등 없이 살아가도록 지원하는 게 저희 역할이죠. 저희가 도움을 줘서 문제가 해결될 때 보람이 커요.
- 캐서린 선생님이 미국에서 이주민으로서 꽤 오래 사셨잖아요. 그래서 최근에 외국인들을 위한 영어 수업을 열었어요. 여기에서도 이주자들을 위한 비폭력대화 수업을 열면 좋을 거 같아요. 혹시 필요하시면 연락주세요. 나누러 오겠습니다.
저희도 학부모들을 대상으로 프로그램을 한 적이 있어요. 비폭력대화는 부모들에게 특히 필요할 거 같네요. 그리고 문래동에는 저희가 서울시에서 위탁받은 ‘이주배경청소년센터’가 있어요. 여기는 30-40명 정도가 오는데 거기는 100여 명 정도 수용할 수 있는 큰 시설이에요. 거기서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을 거 같네요. 아이들은 언어가 짧아서 쉽지는 않겠지만 짧으면 짧은 대로 방법이 있겠죠.
- 아이들이 한국에 안정적으로 정착을 하려면 소통이 잘 되어야 할테니 꼭 필요할 거 같네요. 저도 산청에서 이주여성들을 대상으로 특강을 한 번 했었는데, 어디 가서 소통할 데가 없었다고 되게 좋아하더라구요. NVC센터와 이주민이 같이 할 수 있는 길이 열리면 좋을 거 같아요.
서울법대를 나와 사익보다는 공익을 추구하는 변호사, 소송보다는 합의를 이끌어내는 변호사, 번 돈의 상당 부분을 공익활동에 재투자하는 변호사, 아이들에게 화려한 스펙을 만들어주기보다는 스스로 선택하는 삶의 길을 안내한 부모. 소위 서울법대 출신 엘리트들의 민낯으로 세상이 깜깜한 요즘, 이 분과의 만남은 한 줄기 빛과 같았습니다.
일터에서 NVC
인터뷰 : 윤인숙 (한국비폭력대화교육원 공동대표)
사단법인 이주민센터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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