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폭력, 화해권고 현장_대화를 하고 있는 한 우리는 진보를 이뤄내고 있는 것이다.

2018. 8. 29. 13:51기린을 위한 주스

대화를 하고 있는 한 우리는 진보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타계한 코피 아난 전 유엔사무총장이 즐겨 쓰던 말이라고 한다.

 

나도 소년보호사건의 화해권고절차를 진행할 때 시작하는 말로 자주 인용한다어떤 이유에서든 그 자리에 나왔다면 대화를 하려는 의지가 있다는 것이고, 마주 앉은 것만으로도 이미 대화는 시작된 셈이어서 기대를 갖게 된다.

 

하지만 대화가 시작된다고 모든 사건이 만족할 만한 과정과 결과로 이어지진 않는다. 무리한 배상을 요구하거나 해결되지 않은 부모 자신의 문제를 투사하여 자녀나 상대를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들도 있다.

 

대부분은 그 자리에 오는 과정에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고, 상대는 싸워서 이겨야 하는 적이 되어 있다. 다만 고통스러운 이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 종결되기를 바라는 마음만 같을 뿐이다.

 

화해권고 제도는 좀 더 넓은 목적과 함의를 갖고 있지만 실무적으로는 양측이 민,형사상 합의를 하여 합의서에 서명함으로써 갈등과 분쟁을 종결하도록 권고하게 된다그러다 보니 법대로하려고 법원까지 오게 된 당사자들로서는 화해권고제도를 합의로 몰아가는 것이라고 오해도 하고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절차를 진행하는 자체가 의미가 없는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사건으로 인한 상처가 아직 회복되지 않았거나 자신이 받은 고통의 대가를 상대가 치르기를 바라는 입장에서는 화해권고라는 용어 자체도 못마땅해 한다절차의 핵심이 대화에 있음을 설명하면 이제 와서 무슨 대화가 되겠는가?’ 하는 심정을 내비치지만 나로서는 여전히 대화가 필요하다는 말로 들린다.

 

학교폭력 사건의 특성상 접촉을 금지하는 불가피한 조치가 취해지다 보니 직접 소통하지 못하고 주변사람들의 입을 통해 이야기가 오가면서 오해가 증폭된다당사자의 고통은 물론이고 주변의 관계들이 깨어지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뀌는 2차 피해로도 이어진다.

 

학교폭력자치위원회가 열리면 학폭사건이 되고 이후 내려진 결과에 대한 불은 재심신청과 법정소송으로 이어져 치열하게 싸움이 시작된다물론 심각한 사건도 있고 법적인 처벌이나 조치가 분명히 필요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법원에서 만나는 학교폭력사건 유형 중에는 소소한 갈등이나 오해에서 비롯된 사건으로 어쩌다 여기까지 올 수 밖에 없었는지 안타까운 사건들도 많다.

 

사건의 일정부분은 학교 안에서 교사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중재해서 해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가래로도 못 막을 만큼 커지기 전에 호미로 막을 수 있는 것은 막아야 한다.

 

화해권고 예비 기일에 출석한 당사자로부터 듣는 말은 대부분 비슷하다.

 

피해학생측은 상대가 제대로 된 사과조차 없고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르고 있어서 법정까지 오게 되었다고 한다. 사건을 축소하기 위해 학교와 교사가 가해학생을 비호한다고 비난한다.

 

가해학생측은 상대가 금전배상을 기대하고 소송을 하는 것이다. 진심으로 사과를 하려고 노력했으나 접촉을 금지해서 만날 수도 없었다. 억울한 처분으로 불이익을 받게 된 것에 교사와 학교도 책임이 있다며 비난으로 시작한다.

 

갈등 당사자끼리는 물론이고 학교와 교사에 대한 불신과 소통이 안 되는 것에 대한 원망이 가득하다. 현실적으로 교사 자신이 법적인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조항들이 있지만 당사자가 배제되고 소통이 통제되는 가운데 일방적으로 진행된 학교폭력자치위원회의 결론은 양측 모두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말한다.

 

학폭의 처분과 재심청구의 결과를 신뢰할 수 없는 부모들은 마지막으로 법원의 판단을 받기 위해 학년이 바뀌어도 소송을 이어간다.

 

시간, 노력, 비용이 들고 지쳐가는 동안 자녀들은 이미 화해가 되어 PC방도 다니고 함께 어울리는데 부모들끼리 법정다툼을 하고 있어서 말도 못하고 눈치를 보는 경우도 있다. 학생들의 문제가 학교 안에서 해결되지 못하고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학교 밖에서 싸움을 이어가야 하는지, 이런 절차가 어떤 교육적인 의미를 실현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최근 학교폭력 관련 법률의 검토와 개정이 이슈로 부각되고 있는데 우선 학교 안에서 갈등을 해소하고 문제 해결과 회복을 도울 수 있는 교육적인 대화시스템이 정착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화해권고제도는 법원에 오기 이전에 학교에서 더 필요한 절차라고 생각한다절차를 진행하며 사과와 금전배상을 넘어서는 그 이상의 화해와 치유가 일어나는 것을 종종 목격하고 있다.

 

설사 배상에 관해서는 양측이 합의에 이르지 않았더라도 그 일로 인해 서로가 경험하고 있는 것에 관해 나누고 피해를 입은 사람의 고통과 두려움을 나누는 과정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치유와 화해의 과정이 된다.

 

주변에 떠도는 정체불명의 말과 오해의 발단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던 내용을 이해하게 되고, 상대가 원하는 것이 나와 다르지 않음을 발견하며 새로운 국면이 펼쳐지기도 한다.

 

비로소 진정한 사과를 주고받고 서로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 구체적인 합의안을 만든다. 서명을 마친 당사자들은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던 시작 때와 달리 눈물을 흘리며 손을 잡고 상대 자녀들과 포옹하고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돌아가기도 한다모든 사건이 이렇게 순조롭게 바람직한 결과로 마치는 것은 아니다자녀들이 있는 자리에서 보이지 말아야 하는 일들도 일어난다. 그렇지만 대화를 나누는 자체는 해결을 원하는 그들의 간절한 의지가 담겨 있다.

 

 

화해로 종결되는 사건들을 살펴보니 절차 개시 전 개별 면담이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먼저 위원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고 무조건적인 존중과 공감을 받는 경험이 문제의 소용돌이에서 한 발짝 나오게 하고 상대를 만나 대화해 볼 용기도 갖게 하는 것 같다.

 

화해권고 위원처럼 전문적인 훈련 과정을 거치지 않았더라도 어떤 대화 방식과 프로세스가 갈등을 해소하고 화해 과정에 핵심적 도움이 되는지에 대한 경험을 가정과 학교에서 부모와 교사도 배우고 공유할 수 있기를 바란다.

 

예비 기일에 대화를 마치면서 어땠는지 물으면 양측이 또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누가 들어주기라도 하면 좋았을 텐데 들어 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이야기라도 하고 나니 시원해요

대화라도 해봤으면 여기까지 안 왔을 것인데...”

 

대화에서 긍정적인 경험을 했다는 소감으로 들린다. 이런 말을 들으며 우리는 진행자로서 매 순간 대화에 정성을 기울이려고 노력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합의서에 서명을 하지 못하더라도 대화를 나누는 과정 하나하나가 당사자에게 소중한 성찰의 경험이 되므로 그 시간이 배움과 성장의 기회가 될 것이다.

 

학교폭력이 사안의 경중을 구분하지 않고 학교폭력자치위원회를 거쳐 재심청구, 법정다툼으로 이어지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지만 그들의 말처럼 법원까지 오기 전에 어느 한 곳에서라도 충분히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을 나눌 수 있는 대화의 장이 마련되었으면 한다.

 

학교폭력자치위원회에 회부된 사건이라도 당사자들이 충분히 대화하고 공감을 나누는 과정이 처분을 내리는 것보다 선행되어야 한다.

 

학교폭력자치위원회의 전문성과 공정성에 대해 끊임없는 요구가 이어지고 있다. 위원회 구성원은 전문성에 앞서 대화의 장에 나온 사람들에 대한 공감의 태도와 대화를 이끌어 줄 능력을 갖추는 것이 우선이다.

 

영화 블랙팬서에 나왔던 대사이다.

 

현명한 사람은 다리를 만들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벽을 만든다.”

 

자라나는 자녀들을 위해, 배우는 학생들을 위해, 우리의 미래를 위해 어떤 연결의 다리를 만들 것인지 지혜가 필요한 때이다.

 

 

안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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