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9. 4. 12:37ㆍ기린을 위한 주스
귀신과 호랑이
권 영 선
사람들은 현재의 환경보다 더 나은 상황을 간절히 원할 때 고통스러울 것이 예상 되면서도 자신이 선택한 길을 가려고 한다. 이혼을 결심한 당사자들 역시 그 과정에서 자신들이 겪게 될 아픔이 예측되지만 현재보다 더 나을 것으로 기대하는 미래의 삶을 위해 현재의 고통을 감내한다. 그러나, 나는 조정실에서 만났던 당사자들로부터 처음 이혼에 대해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힘들다”, “고통스럽다”, “지친다”, “진이 빠진다”는 등의 말을 거의 매 번 듣고 있다. 이들이 겪고 있는 고통은 이혼 사건의 당사자들 뿐만 아니라 부모, 형제, 자녀 등에게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다. 그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간혹 이혼이 후에 다시 법원을 찾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원인을 보자면 금전적인 문제도 있지만, 주로 사건본인이라 불리 우는 자녀(들)와 관련된 일들이다.
10살 난 아들의 친권행사자 및 양육자 변경을 청구한 어느 엄마가 있었다. 아들이 3살 때 이혼을 했고 그동안 아이 아빠가 아들을 양육하고 있었다. 어느 날 아빠가 때려서 생긴 아이의 상처를 보고 학교에서 담임선생님이 아동학대 신고를 하였다. 아동 학대 혐의를 받은 아빠는 보호관찰처분을 받았고, 이에 불안한 아이 엄마는 아들을 양육하면서 친권자 및 양육자를 자신으로 변경해 달라고 법원에 심판청구를 하였다.
조정실에서 만난 아이 아빠는 말하길 이혼 후 아들을 돌보기 위해 이른 퇴근이 가능한 직장만을 다닐 정도로 아이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열심히 해 왔다고 하였다. 그 날은 아이의 숙제를 봐 주다가 답답한 마음에 볼펜으로 아이를 때리게 되었고, 상처까지 입히게 되었단다. 그렇게 행동한 이유를 물은 내게 그는 낮에 힘든 일이 있었는데 술도 한 잔 했던 터라 좀 쉬고 싶었으며, 아이가 산수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 자기도 모르게 짜증이 나서 그랬던 것 같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어쩌다 있는 일이고, 자신은 아들이 없으면 살 수 없으니 아들과 살 수 있게만 해 달라고 내게 호소를 하였다. 그 날의 일을 매우 후회하고 있고 실수였으며 그리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노라고 말하면서 제발 아이만 만날 수 있게 해 달라고 사정을 하였다. 또, 그는 상담과정에서 아이가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것은 아이 엄마가 시켰을 것이며, 자신은 그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와 30여 분간 대화를 나눈 후 그는 차라리 그 날 자신이 일찍 잠이 들었으면 좋았겠다며 아이한테 너무 미안하고, 이제 아이를 만나면 다시는 화내거나 때리지 않고 잘 돌보겠다고 하였다. 그런 그에게 나는 물었다.
조정위원 : “아이가 아빠에게 매를 맞았을 때, 아이 눈에는 아빠가 어떤 모습으로 보였을까요?”
갑자기 그의 눈이 커졌다. 그의 표정에서 그가 놀라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고, 곧 나의 눈을 피했다. 약간의 침묵이 흐른 뒤 그가 가만히 입을 열어 아까보다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아이아빠 : “귀신이나 호랑이로 보일거예요...”
조정위원 : “본인은 귀신이나 호랑이를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아이아빠 : “나도 어려서 아버지한테 맞으면, 아버지가 귀신이나 호랑이로 보였어요.”
그에게 귀신과 호랑이로 표현되는 자신의 아버지는 공포와 아픔 그 자체였다.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한동안 잊고 지냈던 아버지의 모습을 다시금 떠 올리며, 아들이 자신을 그렇게 봤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너무 미안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어릴 적 자신이 아버지를 얼마나 무서워했는지, 그리고 자신이 화를 냈을 때 아들의 마음이 어땠을지 알 것 같다고 하였다. 그가 어릴 적 경험했던 귀신과 호랑이가 자신에게도 있음을 알게 된 그는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도, 자기 자신도 그리고, 자신의 아들도 모두 힘들었겠다고 하였다.
그의 마음 안에서 이승의 부자(父子)와 저승의 아버지가 연민으로 연결되는 순간이었다.
그의 추측으로 아들이 보았을 귀신과 호랑이는 그 순간 무엇을 원했을까? 그는 쉬고 싶었다고 했다. 아이를 잘 키우고 싶은데 혼자서 돈 벌고 아이 돌보고 하는 일이 생각만큼 잘 되지 않을 때 자신에게 화가 난다고 했다. 또, 아들은 아빠에게 산수 푸는 법을 물어보면서 무엇을 원했을까? 잘 배우고 싶었을까? 숙제를 완성하여 안심하고 싶었을까? 아니면, 저녁에 들어 온 아빠와 숙제를 하며 소통하고 싶었을까? 그는 아들이 자신과 얘기하고 싶었을 것이라고 말하며 다시금 눈물을 글썽였다. 더 나아가 그가 어릴 적 보았던 귀신과 호랑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에 그는 아마도 자신처럼 삶이 고달파 모든 게 귀찮고 그냥 쉬고 싶었을 것 같다고 하였다.
그가 추측한 아버지와 아들이 원했던 것이 실제는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두 사람을 평소처럼 무감각하게 본 것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직면하면서 연결 하려 애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아버지와 아들은 원래부터 그에게 주어진 대상이었으나 지금은 자신의 마음속에 품는 존재가 된 것이다.
조정이 끝나갈 무렵 그는 아들이 누구와 살고 싶어 하는지 이야기를 듣고 아들이 원하는 대로 할 마음이 있으며, 아이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법원의 도움을 청한다고 하였다. 그 날 청구인과 상대방의 양육환경조사를 법원에 의뢰하고 조정은 마무리가 되었다.
부모라면 자식을 잘 돌보고자 하는 마음이 크다. 그런데,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잘 되지 않을 때 우리는 부모로써 책임을 다 하지 못하고 있다고 자책하거나, 자신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다고 아이를 비난하곤 한다. 그것은 이혼을 한 부모라 하더라도 다를 바 없을 것이며, 어쩌면 자식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이 너무나 커 그 고통은 감히 상상조차 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런 생각들이 자신을 점령하고 있을 때 스스로에게 묻는다.
‘지금 나는 나를 잘 돌보고 있는가?’
‘지금 나는 나를 돌볼 수 있는 힘이 있는가?’
‘지금 나는 나를 잘 돌보기 위해 부탁하고 싶은 대상이 있는가?’(자신을 포함해서)
‘지금 떠 오른 그에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부탁하고 싶은가?’
그런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아이를 바라본다.
‘지금 나는 무엇을 위해 아이를 돕고자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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