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일 _ 김진희

2020. 11. 9. 19:08기린 Life

그 일


 


H 선생님은 올해 우리 학교에 처음 오신 분입니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하시는 그 선생님을 저는 성심껏 도와드리려 애썼습니다. 그런데 3분기 모의고사 선별작업을 하는 과정에 H 선생님은 큰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선생님의 실수는 그냥 묻어둘 수 없는 일이어서 수정작업을 위해 제가 인터폰을 했고, 제 전화는 우리의 자칼 싸움을 만들어내고 말았습니다.


(그 일의 구체적인 내용은 이 글의 원본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https://m.blog.naver.com/jeanshine5/222110866238

 


이렇게 우리는 한 바탕 큰 싸움을 하고 찬 바람을 씽씽 내뿜으며 돌아섰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시선을 마주하기가 난처하고 두렵습니다. 제가 지나갈 때 그 길을 피해서 다른 길로 가는 H 선생님을 보거나, 이제 그만 화해하자는 제 문자를 씹는 H 선생님을 보면서 제 마음속에는 분노가 쌓여 갔습니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ㅜㅜㅜㅜ시간이 지나면 잊혀져 가겠지만, 그때 제가 받은 충격도 상당했는지, 그 일은 가끔씩 올라와 제 감정을 휘저어 놓고 가기 일쑤였습니다.


비폭력 대화 수업을 받으며 그 일과 다시 마주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런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대응법이 저에게는 단 하나뿐이었습니다. 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의 공격이 들어올 때, 저는 늘 철저하게 방어막을 세우고 그 공격의 탄환을 다시 상대에게 돌려보내 마구마구 공격을 해댔습니다. 그것만이 유일하게 제가 할 수 있는 대응법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럴 경우 대응법이 세 가지나 더 있더라구요. 그리고 제가 해 온 방법은 그 대응법들 중 나쁜 방법이었습니다. 공격의 말을 그대로 되돌려 서로 할퀴고, 상처 주고, 아파하는..

비폭력 대화에서 알려주는 듣기 힘든 말을 듣고 그 이면의 느낌과 충족되지 못한 욕구를 바라보는 방법을 적용하여 H 선생님과의 대화를 찬찬히 다시 살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H 선생님이 여름방학 동안 천천히 해야지, 좋은 지문을 잘 선별해야지하고 있다가 별안간 끝나는 대로 주세요하는 독촉을 받았을 때 급 불안해졌을 마음이 보였습니다. 또 그렇게 불안한 상태를 추스르고 열심히 해서 넘겨주었을 때 뿌듯했을 마음도 보였습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결과를 만났고, 그래서 얼마나 곤혹스럽고, 맥이 빠지고, 허탈해졌을지 그 마음도 보였습니다. 동료 교사인 저희에게 느꼈을 수치심도 보였습니다. 제가 선생님이 학생이냐, 제발 좀 알아서 제대로 하라고 질타했을 때 그 선생님이 느꼈을 분노도 보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도 틀리지 않고 또박또박 지적을 해 대는 저에게 숨이 막혔겠네요.

정규직이 아니라도 훌륭한 능력을 갖추고 열심히 하고 있다는 인정을 받고 싶었을 텐데서두르는 저를 위해 열심히 한 뒤에 칭찬을 받을 줄 알았을 텐데뜻하지 않은 결과에 자존감이 무너져 버렸겠네요ㅜㅜ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져 허우적대는 H 선생님에게 손을 뻗어 건져 올려주지는 못할망정 그 소용돌이 속으로 아예 푹 빠트려버려 질식사하게 했으니, 얼마나 제가 미웠을까요?


이제 저는 자칼의 입으로 무지막지한 공격을 해 버리고도, 두고두고 억울하고 분하다고 소리소리 질러댄 불쌍한 저를 마주합니다. H 선생님에게 다가가 저의 이 마음을 전하고 싶지만 자신이 없습니다. 또 어떤 자칼이 튀어 나올지비폭력 대화를 충분히 연습한 뒤 마음의 준비가 되면 한 번 시도해 봐야겠네요일단은 그냥 H 선생님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선택한 외면을 존중하겠습니다. H 선생님이 제가 할퀸 숱한 상처로부터 충분히 회복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저도 이제 그만 그 일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습니다.


*** 제게 이런 깨달음을 준 비폭력 대화 수업에 감사합니다. 컴퓨터 화면으로 만났지만, 일분일초 소중하게 수업에 몰입할 수 있게 해 주신 강현주 강사님께 특히 감사드립니다. ***

 

- 2020109일 김진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