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2. 4. 20:05ㆍ기린 Life
일터에서의 비폭력대화 #5
IT업계의 NVC잠입자, 이재면님
한국비폭력대화센터가 있는 서울 서촌에는 오랜 회원인 김형렬님이 사십니다. 2024년 1월 IIT에서 만나 친해졌고, 서촌 주민으로 다시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재면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직장 상사로 힘들어할 때 비폭력대화의 세계로 안내한 대학 후배인데, 후배지만 존경한다고 하더군요. 현재 IT 회사에서 일한다는 말을 듣고, 그곳에서 어떻게 비폭력대화를 펼치고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퇴근 시간에 맞춰 회사가 있는 강남역 근처 G타워로 찾아갔습니다. 1층 보안대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회사에 들어서니, 와!! ‘밥잘사주는 예쁜누나’에서 정해인이 일하던 바로 그런 게임회사였습니다. 널따란 휴게실에는 마침 할로윈데이 시즌이라 게임회사다운 장식이 멋졌습니다. 저 건너편에서는 누군가가 게임을 하는지, 게임할 때 쓰는 자판소리가 타다닥 났습니다.
- 어떤 계기로 비폭력대화를 배우기 시작하셨나요?
회사 얘기를 해야 되는데, 좀 깁니다. 저는 우주과학을 전공했지만, 대학 4학년때인 1993년도부터 IT 개발을 시작해서 2013년까지, 20년간 IT 개발을 했어요. 나이가 드니 관리자가 되어 일을 하는데, 화가 자주 났어요. 넌 이거 하고 넌 저거 해! 그러면서 옛날 방식 대로 일을 했는데 삐그덕 거리면서 잘 안 돌아갔어요. 근데 또 일은 또 엄청 많이 들어왔어요.
당시 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해외에서 개발된 애자일 방식이란 게 있었어요. 상사가 그걸 도입해보자고 제안해서 제가 일주일간 배워와서 적용해 봤더니 일이 잘 돌아갔어요. 맨날 새벽 두시까지 일하고 다음 날 10시에 출근했었는데, 3개월 만에 정시 출퇴근이 가능하게 되었어요.
뭐가 달라졌는지 술자리에서 회고를 했더니 막내 직원이 그러더군요. “팀장님이 권위를 내려놨잖아요.” “웃기는 소리하네, 어제 나한테 권위가 있었냐?” 그랬는데, 그 말이 저를 계속 붙들었어요. ‘권위를 내려놓는다는 게 뭐지?’ 되돌아보니 예전에는 일을 시켰다면 애자일 방식 이후에는 팀을 믿고 팀원들이 스케줄을 짜고 누가 뭘 할지 스스로 결정하게 한 거에요. 제 역할은 의견차가 있을 때 조율하기, 주니어 직원에게 발언 기회 주기 정도였어요. 그게 다 애자일 방식 안에 있었어요. 전 그냥 그 방식을 따라만 한 거에요.
이걸 좀 더 공부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 어떤 이유로 회사를 접게 됐는데, 그때 본격적으로 애자일 공부를 했어요. 그걸 교육하는 회사 대표가 NVC 회원인 김창준님이세요. 과정 중에 추천도서 몇 권을 읽고 코칭대화하는 시간이 있었어요. 그때 제가 고른 책이 비폭력대화였어요
- 그 책이 어떻게 눈이 들어왔나요?
이름이 독특하잖아요. 비폭력? 한 번도 생각 안 해 봤는데, 한번 읽어보자 싶었어요. 사실 저는 비폭력대화 안 배웠어도 누구한테 욕 먹고 살지는 않았어요. 욕도 하지 않았고요. 어른들이 그랬지요. “이재면이 한다면 해도 돼. 다른 애가 하면 안 되지만.” 모범생으로 산 거죠.
그런 말 들으며 40년을 살았으니 제가 하는 건 항상 옳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비폭력대화 책을 보니까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이 다 폭력적인 거였어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거 같았어요. ‘도대체 뭔데 이런 충격을 주지?’ 싶어 진지하게 읽었어요.
읽다 보니 그리 대단한 것 같지는 않았어요. 평상시 쓰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다른 건 디테일이었어요. 감정을 다양한 단어로 표현하고, 욕구는 그동안 몰랐던 거고, 부탁도 구체적인 방법이 있더라고요.
그러다 교사인 아내가 비폭력대화센터가 있다는 걸 알고 먼저 가서 교육을 받았어요. 그 후 저도 가서 배웠어요. 책으로는 부족해서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았어요. 제가 예전에는 완전 극 T였거든요. 이해가 안 되면 받아들이지를 않았어요. 그리고 비폭력대화를 배운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너무 궁금했어요. 마침 회사도 그만둔 상태라 그때부터 2년간 배우고 연습모임을 했어요.
- 배울 당시 회사를 안 다니고 계신 게 오히려 행운이었네요.
네. 회사 그만둘 때 나이 마흔이었는데 돌아보는 시간을 갖고 싶었어요. 그리고 회사에서 마지막에 익혔던 애자일 방식을 좀 더 단단히 익히고 전문가가 되어 더 큰 회사에 들어가고 싶었어요. 그 기간 동안 비폭력대화를 만났는데, 저에게 정말 큰 선물이죠. 신의 한 수 같아요. 연습모임도 일반 직장인들 다니는 저녁시간이 아니라 오전에 가서 여유 있게 할 수 있었고, 연습모임을 진행할 기회도 생겼어요. 그 이후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비폭력대화와 애자일을 부캐로 장착하기 시작했어요.
- 40살에 회사 그만두고 2년간 쉴 때 불안하지 않으셨나요?
불안이 없지는 않았는데, 제 기질이 도움이 되었어요. 지금 지진이 나서 다 무너진다 해도 저는 살아남을 것 같아요. 저는 그런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어요. 늘 운이 좋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큰 위험이 들이닥치지 않는 것 같아요. 저는 트라우마도 거의 없어요. 부모님이 싸우는 걸 본 적도 없고,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누구한테도 폭력을 당해본 적이 없어요.
- 아버지하고 사이가 좋으셨나봐요? 형제들하고도 좋았구요.
네. 저는 아버지와 사이가 좋았아요. 근데 형은 좋지 않았어요. 형이 열 살 위인데, 동네 주먹이어서 형이 아버지를 엄청 무서워했죠. 딱히 반항한 건 아닌데, 공부 안 하고 나가서 깡패짓을 하니까 아버지가 몽둥이로 혼을 많이 냈죠. 지금은 아버지한테 아주 껌뻑 죽어요. 군대 갔다와서 갱생 됐어요.
- 형과 달리 공부를 잘하고 모범생이다 보니 아버지가 예뻐하셨겠어요.
엄청 이뻐했죠. 아버님이 하신 얘기가 있어요. 재면이 같은 애는 10명도 키운다고요. “왜요?’ 라고 물으니, “해준 것도 없는데 알아서 혼자 다 컸지” 그러셨죠.
- 형과 아버지의 관계 속에서 눈치를 보면서, 말썽없이 자라야지 그런 생각을 하셨나봐요?
그렇죠. 나를 죽이고 산 정도는 아닌데, 비폭력대화를 배운 후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는데 그런 생각을 못하게 산 게 너무 억울했지요.
- 아, 그러셨군요. 그래서 회사를 그만두고 비폭력대화를 배운 후 내가 원하는 걸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셨나봐요?
누가 시키는 거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어요. 세상에서 제일 가치 있는 게 비폭력대화니까 다른 데 시간을 쓰는 게 너무 아까웠어요. 그래서 강사도 하고 싶었고, 실제 강의도 했는데 막상 해보니 아닌 거 같았어요. 신나서 엄청 잘 가르쳐줬다고 생각했는데 사람들에게 전달된 게 하나도 없었어요. 제가 T라 그랬잖아요. 그래서 효과 없는 일은 안 하기로 했어요.
- 그래서 어떤 방식을 선택하셨나요?
삶으로 보여줘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예전에 실제로 보여줬더니 도움이 되었다는 피드백을 들어서 기분좋지 않았나, 그런 걸 해야겠다 싶었어요. 사람들이 저랑 이야기할 때 좋아하는 포인트가 있어요. 연습 모임라고 해서 연습만 할 줄 알고 오는데 연습은 안 하고 제가 떠들고, 자신의 사례를 얘기하라고 해요. 이렇게 하면 배운 게 있으니까 재미있어 해요. 항상 뭘 하나 알아간다고 피드백을 주세요. 그러면 속으로 ‘오늘 하나 했네!’ 그런 게 재밌어요.
- 그렇군요. 연습 모임에서도 뭔가 알려주시는군요.
네. 사람들은 알아가기를 바래요. 사람들이 저에게 글을 써보라는데 말로 해도 안 되는 걸 글로 하면 무슨 의미가 있어요? 회사에서 강의해 달라는 부탁을 하면 돈만 아깝다, 차라리 코칭을 하시라고 해요. 강의할 돈으로 몇 번 코칭해 주는 게 더 나은 것 같아요. 대중강연 하시는 분들 보면 되게 잘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근데 저는 아니예요. 강연보다 이렇게 실전에서 부딪히면서 알게 하는 게 저에게 맞고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해요.
실전에서 보여주는 게 진짜지요. 그거를 몇 번 경험하면 사람들 눈빛이 달라져요. 예전에 한 번 그동안 어땠는지, 좋았던 거나 아쉬웠던 거를 얘기하라니까 한 여자분이 쭈뼛쭈뼛하면서, “우리 그거 안 하기로 했는데 누가 하는 걸 봤을 때 신경... 아, 뭐라고 얘기해야 되나?” 그러길래 “마음이 쓰였어요?” 물었더니 “맞아요! 그런 좋은 말이 있네요!” 입에서 자꾸 신경쓰인다는 말이 나오는데 적당하지 않았던 거죠. 그런데 제 표현을 듣고는 “맞아요! 어떻게 그런 표현을 하시죠?” 그래서 제가 “연습하면 됩니다.” 그랬죠. 이럴 때 제 기분이 확 달라져요. ‘지금 이 사람 뭐 하나 가져갔다, 백날 얘기해도 안 되는데 한 번 보여주니까 금방 알아듣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오래 걸리는 거 같지만 저에게는 이게 제일 빠른 거 같아요.
하다보니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은 비폭력대화를 실전에서 사용하는 거에요. 이런 일 저런 일, 이 사람 저 사람, 이 회사 저 회사에서 시도했던 일들이 효과를 봤어요. 근데 아쉽게 가족한테는 잘 못 썼죠. 아내가 하지 못하게 했어요.
- 아내도 비폭력대화를 배우셨는데 왜 그러셨나요?
사이 좋을 때는 상관없는데, 화가 났을 때 비폭력대화를 하면 자기를 조종하는 거 같다고 쓰지 말라고 했어요. 이해는 됩니다. 과거에 제가 어땠는지 다 아는데 그거 좀 배웠다고 다르게 얘기하는 게 못마땅했던 거죠.
회사는 제가 예전에 어땠는지 모르니까 원래 그런 사람인가 보다 그러면서 잘 들어주었어요. 그래서 비폭력대화를 실전에 잘 쓰려면 연습을 해야 더 장착이 잘될 거라고 생각하고 연습모임을 계속 진행했어요. 저는 참여하는 것보다 진행하길 원했어요. 진행 방식을 다르게 하고 싶었거든요. 연습모임에는 많이 배운 사람도 오지만 배움이 충분하지 않은 사람들도 오거든요. 그런 분들에게는 알려줘야 계속 올 수 있는 동기부여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연습모임에서는 제가 말을 많이 했어요.
알려주려면 내가 정확히 알아야 되니까 책도 한 번 더 보고, 이렇게도 표현해보고 저렇게도 표현해보면서 연구를 많이 했어요. 욕구를 설명할 때도 나한테 욕구가 뭔지를 깊이 생각해야 설명이 잘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욕구명상도 많이 했어요. 그러면서 연습이 엄청 됐죠. 그리고 회사 가서 실전에서 쓰면서 비폭력대화가 끊어지지 않았어요. 집에선 좀 덜하지만 제가 있는 곳에는 항상 비폭력대화가 있었어요.
또 하나, 나중에 회사생활할 때 도움이 됐던 경험이 있어요. ‘중재과정’을 마치고 나니까 너무나 고맙게도 천안지방법원의 조정위원 제안이 들어왔어요. 이유는 제가 회사 생활을 해본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어요. 형사가 아니라 민사 쪽이라 회사 생활을 해본 사람이 필요했던 것 같았어요. 그때 어려운 갈등사례를 1년 정도 경험할 수 있었던 게 회사로 돌아왔을 때 엄청난 도움이 되었죠.
일하다 갈등이 생겼을 때 제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갈등이 심화되면 법원으로 갈텐데 가봐야 소용없다, 대화로 풀지 않으면 서로 상처받고 끝났다고 얘기해 주었죠. 책에 있는 게 아니라 실제로 경험한 얘기를 하니까 사람들이 귀 기울여 듣더라구요.
또 한가지 시도한 건 코칭이에요. 나이가 들어가니까 주변에 사장도 있고 이사도 있고 부장도 있어서 그들 얘기 들어주면서 고민 상담을 했어요. 그들은 그냥 술 먹고 하소연하는 건데 저에게는 코칭 연습이고 실전이었어요. 그들이 어떤 감정이고 어떤 욕구가 있는지를 공감해 주었지요.
누군가와의 첫 만남 때는 항상 경험해요. 자신들이 몰랐던 욕구를 공감받는 순간 마음이 열려요. ‘이게 뭐지? 이 사람 뭔데 나를 이렇게 건드리지?’ 그러면서 궁금해해요. 그러면 내가 요즘 이런 거 하고 있어서 도와줄 수 있다, 첫 만남은 공짜지만 두 번째부터는 비용이 있다고 말하죠. 농담 반, 진담 반이에요. 왜냐하면 결정권자들이 바뀌는 게 회사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직원들에게 큰 자극이 되고 위안이 되요. 그래서 비용을 청구하는데, 줄 수 있는 한 많이 달라고 해요. 그럼 처음에는 몇 번 해보자고 하죠. 간을 보겠다는 건데, ‘간을 보고 싶으면 봐라, 얼마든지 내줄게’ 하는 마음으로 만났어요.
지금 이 회사에 오기 전에 5년간 만난 분이 있는데, 그분이 여기 와서 일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해주셨어요. 마다할 이유가 없었죠. 사람 많은 곳이 저에게는 가장 좋은 놀이터이기 때문이에요. 뭔가 기여할 수 있는 꺼리가 많잖아요. 그렇게 들어온 지 1년 반 정도 되었어요.
- 회사일을 계기로 비폭력대화를 시작했고, 2년의 배움과 연습 기간을 거쳐 다시 회사로 돌아오셨네요?
비폭력대화를 배운 후 이 좋은 거를 온 세상에 알려야 된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어른들을 막 욕했죠. 이 좋은 걸 왜 안 알려줘서 사람 개고생을 하게 만들었냐, 싶었던 거죠.
- 고생한 거 별로 없었던 거 같은데, 어떤 고생을 하셨어요?
40년 동안 제 욕구가 뭔지 모르고 산 거죠. 그게 너무 억울했거든요. 비폭력대화를 20대에 알았다면 원하는 일을 하면서 지난 20년이 얼마나 풍요로웠을까? ‘힘들어도 버텨야지, 해야 해, 어쩔 수 없잖아, 나라도 해야지’ 그러면서 회사일, 집안일을 했는데, 그럴 이유가 없었던 거죠.
- 범생이로 살았던 시절이 억울하셨군요.
부모님이 그런 의도로 키우지는 않았지만, 엄청 억울했어요. 사실 부모님한테는 너무 감사하죠. 한 대도 안 맞고 자랐거든요. 근데 또 그게 안타까운 거예요. 다른 경험이 없었어요. 일반적인 삶에서 벗어나는 일탈을 해본 적이 한번도 없었어요. 일탈을 해봤던 친구들이 저를 보면 혀를 찼어요. 세상 모르는 놈, 갑갑하다, 그거 밖에 모르니 그냥 그렇게 살라고 했어요. 그땐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있다는 걸 나중에 알고 나서 아주 큰 슬픔이 있었어요. 부모님을 엄청 원망했죠. 근데 원망이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어요. 그분들이 뭘 잘못했지? 그저 몰라서 못 가르쳐준 거죠. 그게 또 슬펐어요. 부모님이 너무 고생 하셨는데, 진작 알았다면 좀 더 자유롭게 사셨을 텐데...
선배들도 원망 많이 했었는데, 지금은 안쓰러워요. 다양한 선택지가 있는지 모르고 산 분들이 엄청 많은데, 그분들은 이제 어쩔 수 없으니 앞으로 만나는 사람들 만이라도 비폭력대화를 전하는 게 제 삶의 목표가 됐어요. 그런 생각으로 비폭력대화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에게는 비폭력대화 책을 선물로 보내요. 최근 개정판도 벌써 몇 권 사서 보냈어요. 사실 받아놓고는 안 읽어요. 알지요. 근데 나중에 얘기하다 보면 “맞다 책 선물 받은 거 있지, 한번 볼까” 그러면서 좀 더 관심을 가져요. 그때 제가 탁 붙들고 얘기가 쏟아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반응이 와요. 이렇게 조금씩 젖어들어가는 방식이 가장 빠른 길이라고 생각해요. 절대 늦지 않아요.
집에서도 시간이 걸렸어요. 아들이 중학교 때 아내랑 트러블이 있었어요. 그냥 놔두라고 하는데 아내가 교사다 보니 그렇게 살면 대학 갈 때 어떻게 되는지가 보이는 거죠. 그때 하루는 아이 데리고 나가서 바다 보고 오고, 또 하루는 아내 데리고 나가서 얘기 들어주면서 내 얘기 하고 그랬어요. 그러면서 집사람이 많은 걸 내려놨지요. 이제 아이가 고3인데 아내가 그러더라고요. 당신 말이 맞는 것 같다,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것 같다고요. 제가 그랬거든요. 아이하고 사이만 나빠지지 마라. 거리가 멀어지면 회복하기 어렵다고요. 우리 공부하면서 많이 봤잖아요. 지금은 관계가 많이 좋아졌어요. 그렇게 천천히 스며들도록 한 번 시도하고 안 되면 기다렸다가 또 한 번 시도하고 그러죠. 일상에서 제가 비폭력대화 하는 모습을 계속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 늦어도 늦지않다, 중요한 말씀이네요. 지금 이 회사에서는 어떤 역할을 하시나요?
‘디벨롭먼트 디렉터(Development Director)’인데, 쉽게 말해 PM(프로젝트 매니저) 이예요. 회사내에는 개발자, 기획자, 디자이너 그룹이 있는데, 일정 관리해 주고, 소통을 도와주고, 갈등 생기면 퍼실리테이팅 해주면서 일이 돌아가게 하는 거죠. 이건 저의 ‘부캐’에요. 회사에서 원하는 일을 하는 거죠.
프로젝트 매니저들은 숫자를 많이 다뤄요. 언제까지 얼마큼의 일을 누구에게 시켜야 하는지 계산하는 거죠. 보통 PM은 일 시키는 사람으로 이해되는데, 저에게는 이 일이 ‘부캐’라서 하긴 하되 내 방식으로 하겠다고 했어요. 멘토링과 코칭을 추가로 하는 거죠. 저에게는 이게 ‘본캐’에요
저희 회사에는 시니어와 주니어를 매칭시키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그 프로그램은 일대일로 하니까 코칭이나 상담을 하고 비폭력대화도 알려줘요. 주로 성과가 안 나오는 직원들과 대화하면서 모티베이션을 하죠. 사실 저는 모티베이션 시킬 마음이 없어요. 자기가 하고 싶은 거 하는 거지 하기 싫은 걸 시킨다고 하겠어요? 그래서 대화하면서 그들에게 어떤 선택지가 있는지를 쭉 늘어놓고 본인이 선택하게 해요. 여기서 열심히 일하는 게 좋겠다고 선택하면 그 다음부터는 열심히 일해요. 그걸 모르면 누구 때문에 일을 못한다, 뭐 때문에 나가야겠다는 얘기들을 하는 거죠.
여기 오기 전에는 엘지유플러스에서 짧은 프로젝트를 맡았어요. 욕하는 거 같아 좀 그렇지만, 우리나라 회사들은 저 같은 사람을 원하지 않아요. 회사에서는 결정권자가 되게 중요한데, 결정권자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저 같은 사람은 동작을 못해요. 유플러스에서는 그게 가능했어요. 그래서 프로젝트 하나를 성공시켰는데, 저를 지지해주신 분이 퇴사하신다고 해서 PM을 해야 했어요. 근데 저는 그들이 원하는 방식의 PM은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나가려고 했는데 마침 여기서 제안을 해줘서 이리로 온 거죠.
- 일을 제안하신 분이 5년간 코칭하신 분이라고 하셨죠?
코칭은 아니고 1년에 한 번 정도 만나 대화를 나누었어요. 친구 소개로 만난 분인데, 여기 사람들한테도 도움이 될 것 같다고 같이 일하자고 제안을 해주셨죠.
- 그렇게 가끔 만나서 대화하는 분들이 많으신가요?
많진 않아요. 스타트업 대표 몇 분과 삼성 상무 한 명을 만나고 있어요. 삼성 상무는 예전 회사 후배인데 김창준님 회사의 애자일 교육에 왔더라고요. 그때 코칭을 제안했더니 좋다고 해서 시작했어요. 상사 스트레스가 엄청나서 상담을 많이 했지요. 그 친구와 5~6년 정도 만나고 있어요. 반은 의도했고 반은 친하니까 무료로 해줬어요. 이후 그 친구가 소개해 준 사람들은 다 유료로 했어요. 소개받은 젊은 스타트업 대표하고는 2년 정도 코칭을 했어요
- 코치 교육도 받으셨나요?
코칭 비슷한 거를 어깨 너머로 배우긴 했죠. 저는 비폭력 대화가 코칭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해결방법을 알려주는 게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있는 걸 꺼내서 보여주는 게 답이라고 생각해요. 그 분야는 그 사람이 제일 잘 아니까 스스로 방법을 찾아보게 하고 저는 옆에서 돕는 거죠.
코칭에서는 제 사회생활 경험이 도움이 많이 되었어요. IT개발을 20년 정도 했고, 팀장도 해봤고, 20년 동안 개발할 때 대부분 제가 공동창업자여서 대표들하고 이야기도 많이 나눠봤어요. 그래서 결정권자들이 어떤 고민을 하는지 대충 알아요. 이분들은 고민을 말할 데가 없어요. 나약해 보이기도 하고, 고민이 있다는 걸 아는 순간 직원들이 동요하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본인이 가장 고민을 많이 하는데 아무도 몰라줘서 속상해하죠. 직원들은 자기네가 잘해서 대표가 잘 먹고 잘 사는 줄 알아요.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린 얘기에요. 제가 그런 것들을 들어주고 공감해줘요.
가끔 코칭하는 대표들이 같이 일하자고 제안하기도 하는데 제가 거절하죠. 들어가는 순간 직원들은 저를 낙하산으로 볼 거고, 직원들이 제 눈치를 보게 될테니 안된다, 그냥 떨어져서 얘기하고 혹시 코칭할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 달라고 하죠. 그래서 팀장들 몇 명을 코칭하기도 했어요.
- 실전에 잘 사용하고 계시네요. 잘 들어주는 능력을 타고나셨나요?
기질이 그런거 같아요. 화를 잘 안내고, 나쁜 말을 안하죠. 어렸을 때 친구들끼리 욕지거리는 했지만, 악한 마음을 갖고 누군가를 저주하는 건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누굴 위해 사는 삶이 좋다는 게 저의 베이스여서 참 감사해요. 저는 1인자가 되고 싶은 생각이 1도 없어요. 리더가 되는 순간 저의 욕구로 뭔가를 결정하는 게 제게 너무 큰 짐이 될 것 같아요. 리더보다 리더를 도와주는 일에 관심이 있어요. 리더를 잘 도와주면 여러 사람에게 좋은 영향이 간다는 걸 봤기 때문이에요.
비폭력대화를 하다 보니 명상도 하고 불교도 이해하게 되었는데, 사실 죽으면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재밌자고 사는 거죠. 재밌게 사는 방법이 뭘까? 제가 제일 많이 웃고 희열을 느끼는 순간은 앞에 있는 사람이 “그렇게 했을 때 됐어, 너한테 도움 받았어” 그럴 때에요. 제 앞에 있는 사람이 자기 욕구를 확인하고 욕구를 충족하는 방법을 찾아가게 도와주는 거, 그게 지금 제 삶의 목표에요.
요즘도 기회가 되면 연습모임을 만들어요. 비폭력대화를 공부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으면 살살 꼬셔요. 주로 회사에서 만난 사람들이지요. 남자보다는 여자가 많아요. 마음을 들여다 보니까 원하는 남자들이 별로 없어요. 최근에는 옛 엘지유플러스 동료들이 하고 싶어해서 한달에 한번 만나는 모임을 만들었어요.
- 회사에서 직원들과 일대일 코칭도 하시는데, 반응은 어떤가요?
다 좋아하죠. 저는 제 욕구를 명확하게 말해요. 비폭력대화에 대한 얘기를 시작할 때 항상 말하죠. “당신이 만족해 하는걸 보는 게 나의 최종 목적이다. 회사에서 요구하는 일을 하는 건 부캐고, 이게 나의 본캐다. 내가 아는 방법이 있는데 대화하는 방법이다, 당신이 받아들일 수 있으면 해보면 좋겠다” 라고 말하죠. 처음에는 못 알아들어요. 그런데 실제 사례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면 달라져요.
처음에는 “요즘 어떻게 지내요?” 하면서 아이스프레이킹을 하죠. 그런 후에 “요즘 뭐 할때 즐거우세요?” 그러면서 본론으로 들어가죠. 가끔 제가 사람들을 울려요. 자기 욕구를 알게 되는 순간, 그냥 울어요. 저랑 대화를 나눈 후에 이혼을 선택하는 분들도 있어요. 이혼이 하나의 선택지라는 것을 알고는 충분히 고민한 후에 선택하는 거죠. 이혼하고 와서는 제 옆구리 쿡쿡 찌르면서 “저 이혼했어요.” 그래요. 근데 얼굴은 환해요. “미친 거 아냐?” 그러면 ”덕분에 잘 마무리 됐습니다.“ 그래요.
얼마 전에 코칭받은 직원도 엄청 도움을 받았다고 해요. 그래서 이런 멘토링을 회사에서 해도 될까요? 물었더니 자기는 너무 좋았데요. 우리 회사에 이런 거 좋아할 사람들이 또 있을까요? 그랬더니 “많지 않을까요? 분명히 있을 텐데 이런 게 있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부탁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죠.?” 그러더군요.
- 대화를 얼마나 지속적으로 하시나요?
멘토링은 3개월간 한 달에 두 번, 총 6회로 프로그램화 되어 있어요. 그냥 커피챗 하듯이 만나서 얘기하기도 해요. 코칭은 제가 하는 일 중 하나에요. 별도의 수당은 없구요. 회사에서 원하는 걸 하고,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을 만들어서 하는 거죠.
피플 매니징도 하는데, 일주일에 한 번씩 15분간 원온원(ONE ON ONE) 대화를 해요. 그들은 모르지만 그때 저는 코칭을 하죠. 이건 대화가 필요한 직원이 있을 때 해요.
- 선생님에게 배우고 우리 교육원에 와서 이어서 배우는 사람들도 있나요?
한 두 명 정도가 저를 통해 교육원에 갔죠. 한분은 여성 스타트업 대표였는데 얼마 전에 저에게 코칭을 해줄 수 있냐고 물어보길래 바빠서 못한다고 했더니 다른 사람을 소개시켜 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비폭력대화센터가 있으니 거기 가서 배우고 온 후에 대화하자고 했어요. 아마 남편하고 같이 갔을 거예요.
- 회사 소개 좀 부탁드려요
EA(일렉트로닉 아트)라고 다양한 게임을 만드는 미국계 회사에요. 이 회사의 목표는 실생활에서 경험하는 스포츠를 디지털로 만들어서 사용자로 하여금 이게 실생활인지 디지털 세상인지 구분 못할 정도로 경험시켜주는 거에요. 저는 스포츠 게임 만드는 한국 스튜디오 소속이에요.
게임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게임으로 돈 버는 회사에서 일하는 거지요. 온라인 게임에는 총 쏘는 거, 죽이는 거, 해코지하는 거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 회사는 스포츠 게임을 많이 만들어요. 스포츠는 페어한 거니까 다른 거보다 좀 나은 편이죠. 이제는 온라인 게임이 중요한 세상이죠. 옛날에는 실제 스포츠를 했다면 지금은 E스포츠를 하죠. 회사의 목표도 그렇게 나쁘지 않고,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또 다르니까 아주 나쁜 것만 안 만들면 괜찮지 않나 싶어요. 그래서 비즈니스 보다는 회사 사람들이 어떤지 보고, 내가 기여를 할 수 있다면 하고 싶어요.
- 미국기업은 분위기가 우리나라 기업과 다른가요?
다릅니다. 한국 회사에는 라인이라는 게 많잖아요. 외국 회사라고 없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이 회사에는 없는 거 같아요. 여기서는 부서를 스튜디오라고 부르는데, 라인 같은 거 없이 철저히 실력으로 하는 것 같더라고요. 경쟁하면서 저 사람을 밟고 올라가야 돼, 그런 거 못봤어요. 전반적인 시스템이 너무 달라요. 저는 스포츠 게임을 만드는 큰 부서에 속해 있는데, 여기서 낸 성과를 받기도 하고, 전체의 성과를 일부 나눠 받기도 해요. 우리가 돈을 못 벌어도 전체에서 돈을 많이 벌면 보너스가 나와요. 좀 희한해요. 다른 사람이 잘하면 내가 이득을 보고, 내가 잘하면 다른 사람도 나눠 갖는 거죠. 그래서 다른 사람을 밟고 올라가려는 건 별로 없어요. 워낙 일이 많으니까 자기 일 하느라 정신없기도 하구요.
- 미국에서 교수하는 친구도 자기네는 남 신경 쓸 겨를이 없다고 하데요.
여기도 그래요. 그래서 저희 같은 사람들을 활용하는 거에요. 일거리가 몇 시간 짜리인지 계산해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남는 사람 있으면 다른 자리에 맞춰 놓아요. 우리나라는 일 하려면 사람들하고 잘 지내야 하니까 여러 사람한테 줄을 연결해 놓는데, 여기서는 그런 걸 저희가 다 해요. 일이 잘 안 되면 저희한테 얘기하고, 그러면 저희가 다 모여서 회의하고 결정하게 해요. 그런 시스템을 잘 만들어놨어요.
여기도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저를 여기 초대한 분이 굉장한 역할을 한 거 같아요. 엄청 똑똑하시고 큰 회사만 다녀서 회사 시스템을 잘 이해하는 분인데, 미국 시스템을 한국에도 도입한 거죠. 그걸 몇 년에 걸쳐 정착시켜 놓았어요. 제 역할도 원래는 그냥 다른 데 PM처럼 뒤치다꺼리하고 팀원들 쪼는 역할이었는데, 지금은 꽤 많은 결정 권한을 가지고 있어요. DD(디밸롭먼트 디렉터)가 말하면 ”잠깐 멈춰, DD가 하는 얘기 들어봐“ 하는 분위기가 됐어요.
- 요즘 직원들은 어떤가요? 요즘 기업들이 세대갈등이 많은데 여긴 어때요?
직원끼리 이름 뒤에 ‘님’ 자를 붙이는데, ‘재면님께서’가 아니라 ‘재면님이’ 라고 말하면 불편하기도 해요. 근데 무시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요즘 트렌드가 그러니까 편하게 받아들이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러면서 넘어가죠.
조직내 세대갈등도 딱히 못 봤어요. 제 리더가 여기선 뭘 어려워하는 사람을 못봤다고 그래요. “어떻게 트러블이 없어요?” 그러면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그래요. 사람들 이야기할 때 보면 쭈뼛거리는 사람이 없어요. 자연스럽게 얘기하는데, 그게 너무 신기해요. 상대방이 쭈뼛쭈뼛하면 나도 경직될 것 같은데, 늘 이야기 나눴던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말하니까 저도 편해요. 나이 많다고 딱히 저를 불편해 하는 사람은 없어요.
- 그 동안 어떤 회사에 다니셨어요?
처음에는 선배들과 창업을 했고 그 다음에는 ‘아래한글’을 만든 ‘한글과 컴퓨터’에 다녔고, 그 이후에는 선배들과 함께 인터넷 홈페이지 만드는 회사를 만들었고, 핸드폰에 들어가는 프로그램 만드는 회사도 만들었고, 삼성 외주일도 했고, 프로젝트 매니저로 엘지유플러스에서도 일했어요.
프리랜서로 ‘스크럼 마스터’라는 직업이 있어요. ‘스크럼’은 럭비에서 어깨동무하고 앞으로 나가는건데, 그렇게 단기 목표를 세운 후 사람들이 스크럼을 짜서 밀고 나갈 수 있도록 옆에서 코칭하는 게 스크럼 마스터에요. 제가 회사를 그만둘 당시 했던 게 스크럼 마스터 역할이었어요. 그 일을 전문적으로 하려고 쉬면서 공부를 시작한 거죠. 그때 비폭력대화를 만나 비폭력대화 공부를 더 많이 했지요.
이후 다시 돈을 벌려고 IT 분야로 돌아왔어요. 다시는 이쪽으로 안돌아 오려고 했는데, 다시 나를 받아준 곳이 여기였던 거죠. 경험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이전 경력 플러스 비폭력대화를 장착하고 일하고 있어요. 요즘 직장 구하기 어려운데, 정말 운이 좋은 거죠.
- 그러고 보니 저도 비슷하네요. 제 전공이 도시계획인데, 회사 그만두고 비폭력대화 강사를 하려고 할 때 이경아 선생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전공과 비폭력대화를 섞어서 할 수 있는 거를 개발해 보라구요. 전공을 버리고 비폭력대화에 올인하려고 할 때는 귀에 잘 안들어 왔는데, 귀촌하고 시골마을 대표 5년을 하다보니 저절로 그런 길이 열렸어요. 그래서 지금 두 가지 일을 하고 있어요. 하나는 비폭력대화교육원 대표이고, 다른 하나는 마을활동가 교육과 파견활동가를 멘토링하는 일이지요. 주민들 속에서 일하는 마을활동가들의 고충을 듣고 공감하면서 에너지를 회복하도록 지원하는 역할이에요. 앞으로 더 하고 싶은 일이 있으신가요?
지금 돈을 주는 곳이 여기니까 여기에서 일하는 거고, 다른 데서 돈을 주겠다고 하면 거기 가서도 일하겠죠. 어느 곳에 가든 저는 잠입을 할 거에요. 비폭력대화로 코칭을 하겠다고 하면 구성원들이 별로 안 좋아하니, 그들이 모르게 비폭력대화를 전하는 게 제 목적이에요. 나이가 들어 회사를 그만두면 자격증은 없지만 상담이나 코칭 비슷한 일을 할 것 같아요. 연습 모임을 더 만들 수도 있고, 예전에 학교 가서 하던 기린마을 교사도 할 수 있겠지요. 법원조정위원도 다시 하고 싶어요.
- 강사하시는 건 어떠세요? 인터뷰 하느라 다양한 분야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전문 분야 종사자들이 협력강사에 도전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특히 남자 강사들이 많아지면 좋겠어요. 그래야 사회 각층에 좀 더 빨리 확산될 수 있을거 같아요. 꼭 도전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다른 거 다 그만두고 강사만 할 마음은 없지만, 할 수 있으면 하고 싶어요. 재밌을 거 같아요.
정리를 마치며 반성이 밀려옵니다. 나는 과연 어떻게 실전에서 비폭력대화를 쓰고 있는가? 주변 사람들이 나를 보면서 비폭력대화를 과연 좋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두려운 생각이 듭니다. 아직도 얄미운 단계에 머물러 상대 공감보다 내 표현을 주로 하고 사는 것 같습니다. 이번 인터뷰는 나를 돌아보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생각해보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올해 비즈니스계의 키워드는 온통 AI입니다. AI가 주도하는 미래세상에서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공감의 중요성이 훨씬 더 크다고 하니 비폭력대화를 배운 사람들의 역할도 커질 거 같습니다. AI 세상에 비폭력대화를 전하는 이재면님이 있어 든든합니다.
인터뷰일 2024.10.29.
인터뷰 : 윤인숙 (한국비폭력대화교육원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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