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린양육자 인터뷰 03] 마냥 사랑으로 가득 차기를

2024. 6. 9. 15:17카테고리 없음

마냥 사랑으로 가득 차기를

- 기린양육자 인터뷰 프로젝트 (3) 충청도의 귤쌤

 

비폭력대화로 아이를 낳고 키우는 양육자들, 그들에겐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두 번째 인터뷰이 귤쌤을 만났습니다. 귤쌤은 초등학교 교사입니다. 인터뷰 당시 처음으로 1학년을 맡아서 반 전원의 부모 상담을 마친 시점이었습니다. 어떤 부모들로부터는 자신들이 상담을 받은 것 같다는 감사한 이야기를 들었다고요. 내가 괴물부모는 아닌 가 노심초사하는 예비학부모로서 비폭력대화(NVC)를 알고 삶에서 나누는 담임 선생님을 만난 학부모들이 마냥 부럽습니다.

 

귤쌤은 20대와 10대 남매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아내분이 양육을 전담해 왔고, 15년 전 교사 직무연수로 비폭력대화를 만났습니다. 처음 비폭력대화가 어떻게 느껴졌는지 묻자, 어머니를 떠올립니다.

 

저희 엄마는 활화산이셨어요.
엄마가 날 사랑한다는 걸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내가 부모가 된다면 '나는 이렇게 키우지 않으리라' 다짐했어요.
그런데 방법은 모르겠더라고요.
어떻게 따뜻하게 아이들을 만나야 하나?

 

 

교사로서 지내면서도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부임 초년 체벌이 남아있던 분위기라서 1년 정도 체벌을 합니다. 배운 게 그뿐이라 다른 방법을 몰랐다고요. 그러다가 이것은 정말 아닌 것 같아 멈추기로 결심합니다. 결심은 했지만 혼란스럽던 차에 비폭력대화를 만났습니다. 처음엔 기쁘면서 놀랍고 의심스러웠습니다. '저렇게 할 수 있다고? 정말로?'

 

비폭력대화를 배우며 비로소 방법을 찾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학교와 가정에서 열심히 실천하고자 했지만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첫 아이(이하 사랑이)가 중1 즈음 나눈 대화가 큰 배움의 기회였습니다.

 

아빠 : 사랑아, 아빠가 너랑 같이 지내면서 너를 억압하거나 강요하지 않으면서 지내려고 했어. 그런데 요즘에 너랑 같이 이야기 나누다 보면 뭔가 소통이 잘 안 되는 것 같아. 어렵고 답답해. 너는 어떠니?

사랑이 : (잠시 침묵,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아빠가 하는 말은 항상 옳잖아요. 내 이야기를 해도 항상 마찬가지잖아요.

 

 

부모도 교사도 아이가 잘 자랄 수 있게 신념과 경험을 동원해 가장 좋고 옳은 것을 합니다. 하지만 아이 입장에선 그 옳음이 폭력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지요. 상대의 이야기와 마음에 대해서 듣는 것은 저만치 멀어지고 맙니다. 귤쌤은 그 대화를 통해 부모와 교사의 힘이 어떻게 전달되는지는 늘 돌아봐야 함을 알아차립니다.

 

그 이후엔 그저 '너 요즘 어떠니? 어떤 게 힘들어?', '너 요즘 이러저러해 보이는데 걱정된다.' 넌지시 표현하고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이의 욕구가 뭔지 함께 탐색해 줍니다. 그러자 대화가 질적으로 변화합니다. 나의 부모는 나의 이야기를 온전히 수용해 주고 응원해 준다는 믿음을 아이가 갖게 된 것이죠. 비폭력대화는 그저 친절한 대화가 아니라 의도와 에너지로 살아있는, 사랑과 연민과 평화의 언어임을 실감합니다.

 

비폭력대화로 아이들을 키우며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였는지 물었습니다. 귤쌤은 아이들이 자라며 했던 말들을 들려줍니다. 언젠가 중학생 때 아이가 '아빠, 우리 부모님은 다른 부모님과는 좀 다른 것 같아요'라고 말합니다.

 

당시 귤쌤은 바빠도 가족 간의 시간을 자주 가졌다고 합니다. 한때 식구들을 모아놓고 강의를 해 봤는데 본인이 가르치는 존재가 돼서는 안 되겠다 느꼈다고요. 그래서 가볍게 모이고 얘기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과자 같은 간식을 놓기도 하고, 보드게임을 비롯해 정말 많은 고민과 시도를 합니다. 그러면서 그로그(GROK) 카드를 가지고 함께 하는 공감활동을 꾸준히 했습니다. 뭔가 문제나 갈등이 생겼을 때 비폭력대화를 끌어와 아이들에게 묻기만 하는 게 아니라 주기적인 가족모임으로 만나 부모자신의 욕구를 내어놓기도 하고, 아이는 어떤 상태인지, 어디에 에너지를 쓰고,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서로 돌봅니다. 그러다보니 가족모임이 끝나면 딸아이가 '속이 뻥 뚫린 것 같다'라고 하는 이야기를 자주 들을 수 있었습니다.

 

20대가 된 첫 아이는 대학생활을 하며 '아빠, 아이들 지내는 걸 보면 제가 스트레스를 덜 받는 것 같아요.'라고 말하기도 하고, '아빠, 제가 갈등을 대하는 자세가 다른 아이들과 좀 다른 것 같아요. 이게 뭔가요?'라고 묻습니다. 학교생활과 공부를 좋아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걸 찾아 즐기며 살아가는 첫째 아이는 이 '뭔가'를 제대로 배우고 싶다며 올해 2월 스스로 NVC 1년 과정을 듣기로 선택했습니다.

 

귤쌤의 20대는 어땠는지 궁금했습니다.

 

굉장히 분노하며 살았어요.
마음속으로 어머니에 대한 애증을 품고 살았어요.
사랑하는 존재와 갈등이 있다는 게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소모시키는지
어머니하고 다투면서 내가 살 에너지를 거기다 다 쏟아 부었구나 싶더라고요.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와의 관계를 전환하는 기적 같은 시간이 찾아오고 귤쌤은 어머니에 대해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어머니와 안 좋은 기억을 너무 많이 갖고 있어서 어머니가 주셨던 사랑은 떠오르지 않았는데 그제야 어머니의 다른 모습이 보입니다. 사랑을 주셨던 모습 말입니다. 이제는 집에 가서 어머니를 안아드리고, 자주는 아니지만 통화를 할 때면 어머니가 너무 좋아하신다고요.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와 내면을 평화롭게 돌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습니다.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가족들하고 다투고 때론 단절을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을 기술과 에너지가 있다면 그들은 전혀 다르게 살겠지요. 삶을 충분히 누리면서요. 비폭력대화를 한다는 건 나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나의 조급함이나 질서에 대한 욕구가 어떻게 상대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돌아보는 기회입니다. 귤쌤은 이 기회를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 교사 연습모임, 마을 연습모임을 수년 째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에게 학생들은 기꺼이 주고 싶은 존재들이라고 합니다. NVC로 살다 보면 감사와 부탁 두 가지밖에 없다는 말에 깊이 공감한다고요. 사랑과 연민을 품고 나니 고민이 별로 없어졌다는 귤쌤의 말과 말 사이에 이따금 공백이 생깁니다. 그저 침묵으로 함께 합니다.

 

하루는 귤쌤의 아들인 사랑이가 초대를 받아 마을사람들에게 경험을 이야기하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한 중학생 친구가 '공부가 안 될 때 어떻게 했냐'는 질문을 했는데 사랑이는 고1 때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공부 안 하고 새벽 1시까지 게임을 한 다음 날 아침, 아버지(귤쌤)가 이렇게 물었다고요.

 

사랑아, 니가 늦은 시간까지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는 걸 봤어.
근데 이게 정말 니가 원하는 게 맞니?

 

 

내내 내버려 두는 것 같던 아빠가 던진 이 질문을 통해 사랑이는 자신의 욕구와 연결할 기회를 갖습니다. 공부가 의무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해서 하는 것으로 바뀐 것도 그즈음이었다고요. 아이들이 어떤 상태인지, 사람으로 볼 때 좀 더 섬세하게 도울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경험담을 통해, 비폭력대화로 겪어내야 할 저와 아이들의 사춘기를 어림짐작합니다.

 

인터뷰의 막바지, 그는 어느 학부모 모임에서 시를 읽던 순간을 떠올립니다. 다이애나 루먼스(Diana Loomans)의 <만약 내가 아이를 다시 키운다면(If I Had My Child to Raise Over Again)>입니다.

https://www.dianaloomans.com/child.htm

 

이 시의 마지막 행, '나는 힘을 사랑하는 법을 덜 가르치고, 사랑이 주는 힘을 더 가르치리라. (I'd teach less about the love of power, And more about the power of love.)'에 잠시 머뭅니다. 자녀에게 힘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더 큰 힘을 가지길 독려하는 요즘, 사랑이 주는 힘을 가르치는 존재가 절실합니다. 이 인터뷰를 통해 저는 비폭력대화가 그저 대화를 잘하는 게 아니라 내 안의 사랑을 채우고, 그 사랑을 잘 전달해 주는 여정임을 배웁니다. 비록 내가 바라는 형태로 사랑받지 못했어도 말입니다. 스스로 알아채고 자신과 타인에게 사랑을 주기로 선택한 그의 이야기가 그 증거입니다.

 

고학년을 오래 가르치다가 처음으로 1학년을 맡게 된 귤쌤은 요즘 아이들의 조건 없는 사랑을 듬뿍 받고 있습니다. '마냥 사랑만 주고 싶다'는 이 까무잡잡하고 덩치 큰 선생님과, 어린이라기엔 아직 아기 같은 1학년 친구들을 상상합니다. 교실에 가득 차다 못해 밖으로 넘쳐흐를 그 웃음소리와 사랑을요.

 

 

이진희

KBS에서 라디오PD로 일하며 두 아이를 돌봅니다.

비폭력대화와 대중의 접점을 늘리고자 <사실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어요>를 썼습니다.

생애초기 양육자들과 비폭력대화를 나누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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