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6. 9. 19:03ㆍ기린을 위한 주스
헤르만 헤세의 정원일의 즐거움 중에서 발췌합니다.
나무들은 마치 고독한 존재와 같다. 나약함 때문에 현실을 피해 은둔한 자들과는 다르다. 나무들은 베토벤이나 니체처럼 위대하고도 고독하게 삶을 버티어 간 사람들 같다. 나무 꼭대기에서는 세계가 윙윙거린다. 나무뿌리들은 무한 속에 안주하고 있다. 그 사이에서 나무들은 모든 생명력을 끌어모아 오직 한 가지만을 위해서 분투한다. 그것은 바로 나무들에 내재해 있는 고유한 법칙을 따르는 일이다. 나무들 본래의 형상을 완성해 나가면서 스스로를 표현하는 일이다. 아름답고 강인한 나무보다 더 성스럽고 더 모범이 되는 것은 없다.
어떤 나무는 톱에 잘린 채 죽어가면서 상처를 햇빛 아래 훤히 드러낸다. 그 때 잘린 둥치의 희멀건 부분, 묘비가 되어 버린 그 상처 위에서 나무의 역사를 읽을 수 있다. 나이테와 상처가 아문 자국에는 그 나무가 겪었던 온갖 투쟁, 고뇌, 아픔, 갖가지 행복과 번성했던 시절의 이야기가 충실하게 기록되어 있다. 굵은 나이테가 만들어진 해는 무성하고 화려하게 피어났던 때다. 나이테가 가늘었던 해도 있었다. 그해 나무는 거센 공격을 이기고 폭풍우를 견더낸 것이다. 젊은 농부들은 모두 알고 있다. 가장 강인하고 가장 고귀한 나무가 어떤 것인지를. 높은 산꼭대기에 서서 늘 계속되는 위험에 처해 있으면서도 결코 파괴되지 않고 굳센 둥치로 자라는 나무가 가장 좁은 나이테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나무들은 성스럽다. 나무에 귀 기울이고 나무와 이야기를 나눌 줄 아는 사람은 진실을 체험한다. 나무들은 무슨 교훈을 설교한다거나 처방을 내린다거나 하지 않는다. 나무는 개별적인 일에는 무관심하지만 삶의 근원적인 법칙을 알려준다.
한 그루의 나무가 이렇게 이야기한다.
"내 안에는 핵심이, 하나의 불꽃이, 하나의 생각이 숨겨져 있다. 나는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다. 영원한 자연의 어머니는 나와 더불어 전례가 없던 일을 시도한다. 내 모습과 내 피부 밑에 흐르는 혈관은 다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한 것이다. 내 우듬지에 매달린 가장 작은 잎사귀가 벌이는 유희, 내 가지에 난 아주 작은 상처조차 유일한 것이다. 내 사명은 바로 그런 일회적인 것 속에서 영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그루의 나무가 이렇게 이야기한다.
"믿음이야말로 나의 힘이다. 나는 조상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해마다 내 몸에서 탄생하는 수천의 자손들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모른다. 나는 내 씨앗 속에 간직된 비밀을 지닌 채 마지막까지 살아간다. 그밖에 어떤 것도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나는 내 안에 신이 있다고 믿는다. 나는 나의 의무가 성스럽다고 믿는다. 이 믿음 때문에 나는 살고 있다. "
우리들이 서글퍼져 더이상 삶을 버텨내기 힘들어질 때, 나무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조용히 하라! 조용히 하라! 나를 바라보라! 삶은 쉬운 것이 아니다. 삶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런 생각은 모두 어린아이 같은 것이다. 신이 네 안에서 말씀하시도록 하라. 그리고 너는 침묵하라. 네가 두려워하는 것은 네가 가는 길이 너를 어머니로부터, 고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가게 하는 때문이다. 그러나 내딛는 걸음마다, 매일 매일이 너를 새롭게 어머니에게 이끌어간다. 고향이란 여기 혹은 저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고향은 너의 내면에 있든가 아니면 어디에도 없다."
밤바람에 소슬거리는 나무들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정처 없이 떠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가만히 오랫동안 귀 기울이노라면, 방랑하고 싶은 마음의 의미가 드러난다. 그것은 고통이다. 고통을 겪으면서도 거기서 벗어나고 싶어하지 않는 그 무엇이다. 방랑은 고향을 그리는 향수이며, 어머니를 기억하려는 동경이다. 삶의 새로운 비유를 찾으려는 동경이다. 방랑은 고향집으로 이끌어 간다. 모든 길은 고향집으로 향해 있으며, 모든 걸음은 탄생이다. 모든 걸음은 죽음이며, 모든 무덤은 어머니이다.
그처럼 나무는 저녁에 우리가 어린아이처럼 불안해할 때 솨솨 소리를 내며 말한다. 나무들은 긴 생각을 지니고 있다. 우리들보다 더 오래 살며, 호흡은 길고 고요하다. 우리가 나무들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한 그들은 우리보다 현명하다. 나무들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우면서 생각이 짧고 어린애같이 서두르는 우리들은 말할 수 없는 즐거움에 젖는다. 나무들에게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운 사람은 더 이상 나무가 되려고 갈망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이외의 다른 무엇이 되려 하지 않는다. 바로 그것이 고향이다. 그것이 행복인 것이다. (1918년)
함께 산딸나무 15그루를 심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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