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2. 5. 13:20ㆍ카테고리 없음
『일터에서 NVC』 NVC코칭대화를 통해 삶을 재구성한 건축가, 김선아
김선아님은 이태리 베니스 국립건축대학에서 건축학 석사, 로마국립대학에서 도시계획학 박사 학위를 받고 서울에서 건축 및 도시계획 사무소((주)스페이싱엔지니어링건축사사무소) 를 운영하는 건축가입니다. 저와는 2003년 서울시 청계천 시민위원회에서 만났습니다. 동갑이라 친해졌지요. 제가 2010년 비폭력대화를 배운 후 업무적으로 도움이 될 거라고 몇 차례 권유한 적이 있는데, 별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2013년 어느 날, 아무래도 비폭력대화를 배워야 할 거 같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 비폭력대화를 배워야 할 거 같다고 말한 그때, 어떤 일이 있었나요?
2013년, 당연히 우리 회사가 수주할 것으로 생각했던 프로젝트가 제안서 평가에서 탈락하고, 다른 회사에게 넘어가는 일이 발생했어요. 그런데 이 프로젝트에서 회사 차원에서 수주는 실패했지만 전문가 역할로 제가 개인적으로 프로젝트에 도움을 주어야 하는 상황이 생겼습니다. 프로젝트를 수주한 회사와 함께 일을 해야 하는 힘든 상황이 벌어진 거죠. 어떻게 같이 1년을 일해야 되나, 고민이 많았죠. 상황은 싫지만 제가 할 역할은 또 잘 해내고 싶었고요. 어떻게 해야 내 마음을 잘 다스리면서 이 프로젝트에서 내가 맡은 역할을 잘 할 수 있을까, 또 아무래도 회의가 많다 보니, 내가 말을 해야 하는 때에 가시 돋친 말이 나오지는 않을까... 그래서 프로젝트팀에 악영향을 미치지는 않을까... 여러 사람들과의 원활한 협력 과정에 걱정이 많이 되었어요. 그때 비폭력대화가 떠올랐어요.
또한 당시 50세가 다가오면서 갱년기 증상도 시작되었고, 그 과정에서 회사를 운영하면서 직원들하고의 관계도 개선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내 딴에는 배려하고 줄 만큼 준다고 생각하는데 나의 말에 상처받았다는 직원들이 있다 보니까 나도 너무 힘들어서 개선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요.
- 배우니까 어땠나요?
당시 신촌에 있는 센터에 가서 배웠어요. NVC1을 듣고 너무 좋아서 한 달 후 NVC2를 듣고, NVC3는 몇 년 후에 들었어요. 그 중간에 코어자칼도 한번 하고, 돌아가신 아버지 일로 정지선 선생님께, 박기원 선생님한테는 위 프로젝트 과정에서 NVC1, 2를 마치고 개인 상담도 받았어요. 지금은 권영선 선생님께 필요할 때마다 코칭을 받고 있어요.
NVC1을 배우면서 놀란 점은, 세상에는 너무나 다양한 감정 표현이 있다는 거였어요. 보통 화난다, 열 받는다, 우울하다 정도의 단어만 가지고 있는데, 60여 개가 넘는 느낌말을 보고 놀랐어요. 그리고 나에게 있는 감정이 다른 사람에게도 있다는 걸 알게 된 게 또 굉장히 놀라웠고, 내 느낌을 자세히 들여다보니까 상대방의 느낌도 알게 되었지요.
그다음 NVC2가 또 굉장히 도움이 됐는데, 내 안의 욕구를 깊이 들어가는 과정이 놀라웠어요. 그때 강사이신 박기원 선생님이 욕구 찾는 질문을 굉장히 집요하고 힘 있게 하셔서 욕구에 깊이 들어가게 되었어요. 당시 저는 남편에게 불만이 굉장히 많았어요. 남편으로부터 사랑받고 싶다고 계속 얘기를 했는데, 내 욕구를 더 깊이 들어가 보니까 남편이 애정을 주건 말건 상관없이 내가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욕구가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되었어요. 깊은 욕구를 발견할 때 내 삶에 근본적인 답이 나온다는 걸 알게 된 게 NVC에 확 빠지는 계기가 되었죠.
- 비폭력대화를 배우고 나서 일에서는 어떻게 도움이 되었나요?
2013~14년에 비폭력대화를 배우면서 프로젝트를 마무리했고, 2015년 제 사무실 일 이외에, 익선동이 있는 돈화문로 일대 종로3가 지역에서 비영리 단체 “창덕궁앞열하나동네”를 지역주민들과 함께 만들고 마을 활동을 시작했는데 그 일 할 때 NVC가 큰 도움이 됐어요. 제일 도움 된 점은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습관이었어요, 그런데 마을 일을 하다 보면 많은 사람의 의견들이 오고 가는데, 그 과정에서 사람들의 부정적 리액션이 올 때도 많았지요. 그때마다 그런 리액션을 받은 내 자신도 잘 보살펴야 했는데, 그걸 간과했어요. 그게 오래 쌓이다 보니 마음이 힘든 상태가 되었어요. 번아웃, 우울증, 공황 증상 등... 이건 대부분의 마을활동가들이 겪는 어려움일 거에요. 사람들 말을 잘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기돌봄도 같이 해야 된다는 걸 나중에 알았어요.
게다가 회사 직원들하고도 소통을 잘해야 하는데, 마을 활동에 에너지를 많이 쓰다 보니까 직원들 이야기를 들어줄 여유가 없었어요. 직원들 마주 보는 시간에는 이미 내 마음의 여유가 고갈이 된 상태라 작은 자극이 와도 감정이 넘쳤습니다. 그때 직원들이 많이 힘들어 했어요. 회사 운영도 쉬운 일이 아니고 에너지를 많이 써야 하는데, 마을 일을 시작하면서 마을 쪽에 에너지를 다 쓰고 회사 일을 하려다 보니 문제가 생겼지요.
- 당시 회사 일과 마을 일 두 가지를 했군요. 마을 일을 하게 된 건 어떤 이유인가요?
공공에서 지역을 바라보는 태도에 불만이 많았어요. 그 지역, 주민들의 필요와 욕구에 기반해 일을 하는 게 아니라 공공기관의 필요가 우선되는 것에 납득이 잘 가지 않았어요. 화도 났어요. 지역 활성화를 하는데 물리적인 요소 개선 중심으로 사업을 하다 보니 그전에 하던 개발사업과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저는 이 프로젝트에 전문가로서 관여한 사람으로 주민들의 실질적인 욕구와 그들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면서 사업을 하자고 행정에 여러 차례 얘기했지만 잘 받아들여지지가 않았어요.
그래서, 내가 그 일을 직접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NVC로 내면의 힘이 갖추어진 상태라 그랬을 거에요. 지역에서는 제가 주민들과 몇 년 동안 관계를 형성한 상태였기 때문에 제가 마을을 떠나면 구심점이 없어지는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제 사무실을 익선동 근처로 옮기고 마을일(비영리 단체 창덕궁 앞 열하나 동네 창립 및 사무국장, 매거진 편집장) 을 하게 되었어요.
옛날 같으면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엄두를 못 냈을 거예요. 책상 위에서 건물이나 도시설계를 하던 사람이었고, 공공기관과는 비교적 좋은 호흡으로 오랜 시간을 일을 해왔기에, 서로 다른 의견으로 대립을 하는 상황은 상상을 못 했습니다. 근데 NVC를 하면서 어느 정도 내적 에너지가 채워진 상태였고, 아직 젊은 40대다 보니 협의나 타협보다는 제 신념이 더 중요했고, 그 신념을 추진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어요. 어찌 되었건 공공기관과 협의하고 같이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 NVC를 배우면서 깊은 욕구를 발견하고 그 에너지로 공공기관을 벗어날 수 있는 힘이 생긴 거네요
그렇죠. 공공기관이 예산을 쓰는 방향( 물리적 공간 정비를 우선하는 방식)에 대해 굉장히 화가 났어요. 분노에 가까웠는데, 그 에너지를 생산적으로 쓴 거죠. 그때 상담해 주시던 박기원 선생님이 이 에너지를 나를 불태우는 쪽이 아니라 생산적인 에너지로 쓸 수 있도록 도와주셨어요.
- 깊은 분노 밑에 어떤 욕구가 있었나요?
지역 활성화가 꼭 공공의 돈으로만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시간이든 돈이든 에너지든 나를 도울 사람이던 내가 할 수 있는 자원을 다 모아서 한번 해보자, 도전해보고 싶었던 거죠. 지금 생각하면 제가 어떻게 그런 일을 했나 싶어요. 다시 하라면 못해요. ㅎㅎㅎ
- 그렇게 몇 년을 한 거죠?
4년쯤 했어요. 이제 그만둬야겠다고 말하니 그동안 저의 활동을 지켜보면 많은 분들이 할 만큼 했다고 말하더군요. 물론 그간의 활동을 돌이켜 보면 꼭 잘한 건 아니에요. 너무 내 힘으로만 끌고 나가려고 했어요. 문화활동가로서 하고 싶은 게 많았던 거죠. 거기서 문제가 생겼어요. 제가 다른 지역 문화활동가들과 차이가 뭐냐면 그분들은 그 일만 하는데, 저는 전문영역의 회사를 가지고 있어서 그 일도 해야 했어요. 그러니까 더 힘들었던 거죠.
내 회사를 운영하면서 매년 마을 축제를 열고 마을매거진을 펴내는 일을 했는데, 처음 시작할 때는 나름 생각이 있었어요. 내가 해놓으면 공공으로부터 이해와 지지를 받을 수 있다 생각했고, 그 다음부터 예산을 지원할 거다, 나는 시스템을 만들어 놓고 나오고 그 다음 부터는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하자. 그랬지요. 그런데 계속 보여줘도 지속할 수 있는 공공의 지원이 안 들어오는 거에요. 그러니까 계속 보여줘야 했어요. 마을매거진도 서울미디어센터에서 두 번이나 상을 탔는데 우리한테 주던 지원을 끊고 다른 데를 지원했어요. 마을 축제도 다른 지자체라면 2-3억을 썼을 텐데 2천만으로 했다고 하니 다들 놀랐어요. 그런 활동들은 공공에서 지원하고 성장시켰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공공이 그렇게 안 하더라고요. 그런 일이 4년간 계속된 거에요.
- 에너지를 엄청 많이 썼네요.
되돌아보면 마을 축제 아이템들이 지역 콘텐츠를 가지고 만들어 놓은 거라, 제 생각에는, 또 저에게는, 지역주민들에게도 그럴거라 생각하는데,,,^^ 정말 귀한 기획이에요. 지역의 콘텐츠를 가지고 활동한 거에 대해 할 말이 많죠. 나름 평생 갈 수 있는 기획이었어요. 그냥 문화기획자로서 한 풀었다 싶었어요. 마을 분들이 그러시더군요,,, 이태리 유학가서 박사까지 한 사람이 그런 걸 하냐고. 나중에 보니 사람들이 그걸 크게 보더라고요. 건축가나 도시계획가들 중 회사 운영을 하면서 별도로 이렇게 비영리단체 활동을 한 사람은 없었던 듯 해요... 나름 이 점에 대해서는 저에게 격려를 해주고 싶어요.
- 나도 도시계획을 전공했지만 필드는 잘 몰랐지요. 그런데 회사 그만두고 귀촌하고 시골 마을에 들어가 5년간 마을대표하면서 비폭력대화를 활용해 마을 운영을 했는데, 그게 지금 저에게 큰 자산이 되었어요. 김박사님도 현장에서 4년간 자신을 갈아 넣으며 힘들게 일했지만 그때 큰 저력이 만들어졌을 거 같아요.
그렇죠. 그런데 다음에 한다면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겠죠.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하게 될 것 같아요. 사람들의 욕망은 굉장히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다는 것도 알았죠.
- 지역 사람들도 많이 알게 되었죠?
일하면서 몇백 명을 만났어요. 매거진도 처음 2년은 주민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해서 만들었어요. 그 다음 2년은 별도로 인턴기자를 채용하고 취재를 지원하는 역할을 했어요. 그리고 사진촬영, 매거진 편집, 교정 등에 이 동네에 있는 각 분야 전문가, 아마추어로 활동하시는 분들 등, 정말 많은 분들이 함께 만들었습니다. 인쇄소도 후원 차원에서 최소한의 경비만 받으셨고요, 그렇게 일하는데 NVC가 도움이 많이 됐죠. 일단 사람들 만나 얘기 들으면서 공감해 주는 게 제일 도움이 되었어요. 당시 사람들이 저하고 인간적 교류가 이루어졌는데, 이유는 살면서 그런 공감을 받은 적이 없었던 거에요. 이 지역에서 오랫동안 국악이나 주얼리, 금속공계, 한복, 전통식당 등 전통 관련 일을 하시는 분들이 많았는데 누구 하나 그분들을 조명해 준 사람이 없었거든요. 국악하는 분도 국악 잡지에 나오는 정도였지, 외부 사람이 와서 두세 시간 이상씩 들어주고 그걸 글로 써서 모두가 볼 수 있는 잡지에 내준 일은 없었던 거죠. 당시 저희 매거진은 매번 1천부를 발행해서, 이 지역과 서울 전역에 배포를 했었거든요,
그게 또 문제이기도 했는데, 사람들이 저하고만 연결이 되었다는 걸 나중에 알았어요. 서로 서로 들어주는 사이가 돼야 하는데 저한테만 집중되는 상황이 벌어진 거에요. 제 말은 듣는데, 서로 해보라고 하면 안 되더라구요. 그 과정에서 번아웃이 시작되었고 결국 5년 만에 마을 일을 접고 사무실 일만 하는 원래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번아웃 상태를 확대하는 결정적 일이 있었는데, 마을사전 만드는 일이었어요. 이 일을 하면서 완전히 소진되었어요. 4년 동안 만든 매거진에 소개된 이 지역의 주민,공간들을 추려서 한 페이지씩 사전으로 만들었어요. 두세 페이지에 들어간 인터뷰를 네 다섯 줄로 줄이고, 사진도 1장으로 선택하고 그 과정을 사전에 들어가는 모든 분들과 장소 주인들에게 전부 확인을 받았어요. 당시 이 일을 도와주시는 분들이 다섯 분 정도였는데, 코로나 시기라 마스크를 쓰고 다니면서 말이죠. 이분들도 너무나 많은 고생을 하셨어요. 저는 그 글들을 전부 확인을 했어야 하고요. 번아웃 다음에는 공황장애가 왔어요.
- 뭔가 두려운 일이 있었나요?
공황장애는 오랫동안 스트레스가 쌓여서 그걸 컨트롤하는 신경이 망가지는 거예요. 드라마 보다가 가슴 뛸 일이 없잖아요. 근데 갑자기 두근두근해지는 거에요. 번아웃이 오면 그렇게 된데요. 번아웃이 공황이나 우울증이나 여러 가지 증상으로 오는데, 저는 공황으로 온 거지요. 그래서 약도 먹고 상담도 받는 등 치료하고 저를 회복시키는 과정을 가졌습니다. 사무실 일도 대폭 줄였고 힘이 없어 야단도 못 쳤죠. 그때 직원들이 엄청 좋아했어요. 이 시기에 권영선 선생님한테 코칭을 받기 시작했어요. 지금은 완전히 회복되었고, 회복 이상의 더 좋은 성능의 마음가짐을 가지게 된 듯 합니다.^^ 전화위복이라고 할까요. ㅎㅎ
- 코칭을 받으니까 어떠세요?
주기적으로 코칭을 하다가 작년부터는 필요할 때 상담 요청을 드립니다. 권영선 선생님은 제가 깨달을 때까지 많이 기다려 주세요. 50대에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소진되어 공황이 오고, 몸은 약해져 가고 회사 운영도 너무 힘들고, 앞날은 불투명하니 뭐 먹고 살까, 회사 닫고 큰 회사로 이직을 할까, 일을 완전히 그만두고 백수로 살까, 등등 그런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러다 재작년 겨울, 어느 순간에 생각이 정리되면서 그동안의 코칭과정에서 해주신 이야기들, 방향에서 암시했던 내용들이 확연히 깨달아졌습니다. 그러면서 10년, 20년도 더 일을 더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왔어요. 이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살아야 된다고 생각하니까 앞날이 안 보였던 건데, 코칭 덕분에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서 미래를 새롭게 살 수 있는 힘을 얻은 거죠. 에너지가 없다, 나이가 들어 체력이 없다. 그러니 에너지를 뺏는 걸 다 줄여야겠다는 깨달음이 왔고, 나를 힘들게 하는 활동, 요소들을 내 일상에서 다 뺀 후 내 에너지를 어떻게 쓸까에 포커싱 했어요.
가장 먼저 떠오른 게 사무실공간과 운영 시스템이었어요. 공간관리나 직원들 음료나 간식등 프로젝트 진행 외에 신경을 써야 하는 부분은 차라리 비용을 좀 더 주고 관리해 주는 데로 가자 싶었어요. 그리고 내 방이 별도로 구분되어 있어서 그 안에만 있으니까 외롭더군요. 좀 복작거리는 데로 가고 싶었어요. 그런 걸 다 충족해 주는 곳을 찾았더니 있더라구요. 바로 공유오피스였어요. 그래서 오피스텔을 떠나 공유오피스로 옮겼어요. 이제 2년 지났어요. 여기 오면 우리 사무실 공간이 있지만 나는 거기 안 들어가고 항상 밖의 공유테이블에서 일해요. 코칭을 통해 미래를 새롭게 사는 방법을 실험하고 있는 거죠. 또 스파이크 플러스는 멤버 등록이 되면 모든 지점의 회의실을 다 쓸 수가 있어서 협력회사들이 있는 지역의 스파크 플러스를 이용하기도 해요. 선택지가 많아진 거죠.
그 다음, 나를 위한 시간을 쓰고 싶었어요. 피아노도 배우고 필라테스도 배우고, 내 생체 시간을 존중하고 싶었어요. 예전에는 사무실에 10시에 나와 5시 정도에 퇴근했는데 그거 다 버리기로 했어요, 저는 잠자리에서 막 일어났을 때인 오전이 제일 집중이 잘 돼요. 씻지 않고 공복에 커피 두 잔 마시면서 12시까지 일하면 남들 8시간 일하는 만큼을 해요. 그래서 저는 오전에는 재택 하면서 업무지시는 스카이프, 카톡과 같은 앱을 통해 텍스트로 전달을 하고, 구체적인 이야기가 필요할 때는 전화로 하고, 점심 먹고 나와서 직원들이 일하는 거 돌아보는 식으로 일하는 방식을 바꿨지요. 그리고 각자 알아서 할 수 있게 일을 배분하는 걸 2년간 저스스로에게 트레이닝 했어요.
그리고 전에는 김선아 = 회사였는데, 이 공식을 깼어요. 이게 세 번째 큰 수확이에요. 전에는 회사가 곧 나니까 직원들은 내 자식이었어요. 애정을 주지만 내 자식이니까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거리감을 유지하지 못했어요. 코칭을 받으면서 그걸 깼어요. 지금은 달라요. 회사는 김선아가 자기 전문성을 가지고 경제적 활동을 하는 곳이고, 나의 자아실현은 회사 밖에서도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다양한 협회 활동이나 개인적인 활동을 따로 해요. 지금 회사는 제 삶의 여러 영역 중 하나에요.
그러니까 삶이 엄청 달라졌어요. 회사일에 쓰는 시간을 줄인 건 아니지만 마인드가 바뀌면서 정신적으로 너무 자유로워요. 회사에서만 내 가치를 꼭 실현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내 가치 실현은 회사일이 아니라 책쓰기 등 별도의 활동을 통해서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 동안은 회사 일에서 내 가치를 실현하려고 하다가 공공기관들의 담당자들과 계속 부딪혔어요. 미련한 짓이었죠. 그들을 고객으로 모셔야 되는데 내 신념을 주장하니 고객이 머리 아픈거죠. 이 두 가지 이슈를 코칭 대화하면서 깨달았어요.
- 공유오피스 아이디어는 어떻게 발견하셨어요?
내 방에서 혼자 외롭다고 느끼던 차에 성수동에 있는 ‘헤이그라운드’ 라는 곳에 있는 잡지의 편집장을 만나러 갔는데, 그 공간을 보고 한눈에 반했어요. 바로 이거다 싶었어요. 돌아와서 바로 헤이그라운드에 지원서를 냈어요. 그런데 그곳은 비영리 활동 기업을 우선하기 때문에 20페이지짜리 레포트까지 썼어요. 우리 회사가 그런 걸 한다는 걸 입증하려고요. 근데 지점이 2개밖에 없다보니 자리가 안났어요. 그때 잡지사 편집장이 ‘스파크 플러스’라는 곳이 있다고 알려줘서 여러 지점을 돌아보고 지금 이곳을 결정하게 되었어요.
오니까 새로운 세계가 열렸어요. ‘공유성’이 이 시대의 중요한 화두라는 걸 깨닫게 된 거죠. 제가 지금 설계하고 있는 것도 1인~2인이 살 수 있는 공유집합주택이에요. 앞으로 저는 건축가로써 도시계획가로서 도시공간에 공유성을 잘 설계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 예전처럼 젊은 정규직원은 없나요?
공유 오피스로 오고 회사 시스템을 정비하면서 신입사원이나 5년 이하 경력자는 채용을 안하기로 결정을 했어요. 제가 이런 젊은 직원들을 함께 일하는 방식에 서툴다는 것을 깨달았고, 제 능력이 안되는 일에 너무 에너지를 쓰지 않기로 결정을 했기 때문이에요.
- 2030세대 얘기하면서 이들이 과연 직장에서는 책임감 있는 직원일까, 이런 얘기를 했잖아요. 어떤 생각이신가요?
어느 순간부터 근로자들 권익이 상승해서 책임보다는 권리주장이 더 많아요. 사회는 밸런스가 맞아야 되는데, 지금은 완전히 전도된 분위기죠. 젊은 세대에게는 권리와 책임을 같이 가르쳐야 해요. 지금은 책임의식 없이 권리만 주장해서 서로 피해를 입어요. 근로자들이 책임의식을 갖고 일을 잘 해야 잉여가 생겨서 사업주가 재투자를 할 수 있는데, 권리만 주장하니 모든 리스크를 사업주가 다 떠안게 되고, 그러면서 점점 사업을 하고 싶어하지 않아요. 계속 그렇게 되면 근로자한테 피해가 돌아가게 될 거에요.
- 지금 작은 조직의 리더들이 굉장히 힘들다고 하데요.
어디다 말도 못하고, 무지 힘들죠. 우리 회사가 계약직을 쓸 수 있는 건 그나마 재정이 되니까 그런 건데, 다른 소규모 설계사무소는 월 300만원 정도 직원 두세 명 데리고 일해요. 그런 사무실 대표들 대응방법은 그냥 참는 거예요. 안 그러면 못 견뎌요. 직원들을 모시고 회사를 운영해야 하니 남은 일들은 주말에 나와서 대표가 알아서 다 커버해요.
- MVC를 배운 후 직원들과의 소통은 어땠나요?
제가 연습이 부족해서 잘 안되었어요. 배우는 단계에서는 굉장한 자기 위로를 받았는데, 현실에서 쓰려면 연습이 필요하더라구요. 강의 한 번 들었다고 잘 안 돼요. 오히려 얄미운 단계만 지속되서 차라리 모르는 때보다 더 마이너스인 경우도 있었어요. 그래서 연습이 필요한데 시간을 못냈지요. 그래서 도움을 받으려고 상담과 코칭을 받은 거에요. 선생님을 따로 만날 수 있으니 감사하죠.
- 혼자 안 되니까 연습모임을 하고, 코치들이 필요한 거죠. CEO들은 다 코치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맞아요. 정말 너무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다른 사람들에게도 하라고 권유하는데, 자기 얘기를 어떻게 모르는 사람한테 얘기하냐고 그래요. 제가 NVC를 배우러 간 이유는 편안하게 살고 싶고, 사람들하고 싸우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즉 최소한 그런 욕구가 있어야 되는 건데, 사람들이 배우러 안 가는 거는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은 거겠죠. 참을 만 하니까 참는 거고,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는 거겠죠. 말하다 보니 갑자기 저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네요. ^^ 저는 세상을 선하게 살고 싶고 사람들 모두가 함께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던 거 같아요. 물론 NVC를 배우러 오지 않는다고 그렇지 않다는 것은 아니예요. 실천적 욕구에 대한 것과 실천을 할 수 있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느냐의 문제인 듯 해요.
- 그렇죠.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막상 배우러 오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들은 용기있는 사람들이죠. 남편하고의 관계는 어떠신가요?
이윤정 선생님의 부부워크샵에 참여하면서 많이 좋아졌어요. 박기원 선생님한테 상담받을 당시 부부워크샵이 열린다고 가보라고 권해 주셨는데, 그 워크숍이 터닝포인트가 되었어요. 남편이 다른 부부들을 보면서 마음이 달라졌어요. 여러 부부들의 사례와 경험을 보면서 우리 부분에 대해서도 객관화가 된 것 같아요. 그 이후에도 남편과 다투는 일이 있었지만, 다투는 주기나 깊이가 줄어들었어요.
-요즘 남편은 어떠신가요?
요즘은 남편이 그냥 나 자체를 좋아하고 내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고스란히 남편한테 수용되고 있다는 걸 느낍니다. 서로 인간적으로 깊이 좋아하고 있어요.
남편을 보고 있으면 재미난 사람이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우리부부는 늦게 결혼해서 애가 없으니 딴 데 신경 쓸 데가 없잖아요. 오로지 서로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집에서 애들처럼 유치하게 지내요. 우리 어릴 때 아무 걱정 근심 없이 잘 놀았잖아요. 밖에 나가서 뭐 하고 놀까 궁리하는 게 하루 일과였죠. 저나 남편이나 집에서는 그렇게 있으려고 노력해요.
그렇게 지내면서, 저에게 ‘잘 해야한다’는 신념이 왜 생겼는지를 알게 되었어요. 제가 부모한테 그런 대우를 받았기 때문이에요. 저는 잘해야만 사랑받을 수 있었어요. 이걸 잘하니까 참 예쁘다, 그리고 잘해야 한다. 집안의 얼굴이다... 등등 그런 말을 많이 들었어요. 그러니까 잘 해야 사랑받는다, 잘해야 우리 집에 도움이 된다는 신념이 생긴거죠. 저는 일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납득이 안 갔어요. 돈을 받았으면 당연히 돈값을 하고, 재능이 있으면 재능을 다 써서 결과를 만들어내야지 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내 신념에 영향을 준 게 바로 아버지 엄마 둘 다 였다는 걸 최근에 강하게 느꼈어요.
- 어릴 때 엄청 그런 얘기를 들었나봐요
그런 말을 쎄게 들은 게 아니라 집안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그랬어요. 유치원, 초등학교에서 그림을 그려와서 보여주면 엄마, 아빠가 그걸 봐주면 좋겠는데, 수학 몇 점, 국어 몇 점이 더 중요했어요. 어릴 적에 사촌 오빠, 언니들이 오면 붙잡고 내가 그린 그림을 보여주면서 아주 PT를 했어요. 내가 그랬던 게 이해가 갔어요. 부모가 안 받아주니까 딴 데 가서 했던 거에요. 그러면서 내 마음속에는 강하게 ‘잘해야 한다’는 신념이 생긴 거지요.
아무 생각 없이 고무줄하고 놀던 어린 시절과 그 이후 커가면서 부모가 잘해야 한다고 주입하던 시절이 딱 대비되면서, 어린 시절이 기억나고 해질 때까지 나가 놀던 그 시절이 그리워졌어요. 그래서 요즘은 그런 마음가짐으로 지내려고 노력해요.
- 놀랍고 부러워요. 시어머니랑도 잘 지내시죠?
그건 오로지 시어머니 덕분이에요. 다 받아주셔요. 야단을 치거나 강요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추석 때 남편과 다퉈서 안 가도 뭐라고 안 하세요. 몸이 아프다고 핑계대면 어 그래? 그게 끝이에요. 그러니 어떻게 안 좋아해요. 시어머니를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요.
- 가서 얘기 잘 들어주시죠?
많이 들어 주죠. 말이 없던 분인데 어느 순간부터 말을 많이 하시더라고요. 추임새 넣으면서 집중해서 듣고, 말을 계속할 수 있게 계속 질문을 하니까 오만 얘기를 다 꺼내시더라구요. 확실히 NVC를 배우면서 생긴 역량이에요. 예전에 마을 매거진 만들 때도 기사를 위해 나이 드신 국악인들 인터뷰를 하면 당신들 인생을 다 이해받는 기분이 든다고 하셨어요.
경청을 통해서 여러 사람들과 잘 지내게 되셨군요.
그 말 들으니 생각나는 게 있는데, 최근 권영선 선생님한테 배운 세 번째는 ‘자기 보호’에 대한 것이었어요. 그동안 힘들었던 관계를 돌아보면 저의 결핍으로 상대방에게 투사해서 스스로 끌어들인 건데, 잘못된 방식이었어요. 그걸 깨달아서 지금은 옛날처럼 안 해요. 이제는 내 관점에서, 나의 자기보호를 우선 해요. 그걸 처음으로 배웠어요. 나에게 득이 되는지, 실이 되는지도 생각해보고요. 그 전에는 이런 생각을 할 줄 몰랐어요. 그냥 기분대로 말하고, 행동하며 살았어요. 선생님한테 고민이 있어 상의하면 “그 일을, 그 행동을 하면 대표님에게는 어떤 점이 좋은 가요? 어떤 욕구가 충족이 되죠? 안하게 되면 어떤 욕구가 충족되지 되지 않는건가요? 그러시더라구요. 즉 저의 욕구를 기반으로 생각을 하는 것이 평화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욕구명상, 욕구를 기반으로 한 자기 공감, 정말 중요한 듯 합니다. 각자의 결핍이나 욕구를 해결 방법은 다양한데, 다들 자기보호를 우선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저의 경우 자기보호보다는 타인에 투사하여 결핍이나 욕구를 해결해왔던 방식은 결국 자기에게 다시 상처를 주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나에게 뭐가 좋고 뭐가 안 좋지를 그동안 왜 따지지 않았을까요?
내 마음이 니 마음이라고 생각했던 거에요. 나와 상대방의 마음이 다르다는 거에 대한 개념이 없었어요. 내가 이런 마음이면 상대도 똑같다고 생각했고, 내가 뭔가를 도와주거나, 주면 당연히 돌아오겠지 싶었어요. 근데 안 돌아올 수도 있고, 역풍이 불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계속 상처를 받았어요.
아마 저의 욕구와 결핍을 해결하기 위해 자기보호를 중심으로 살아왔다면 회사운영도 좀 더 수월했을 듯 합니다. 회사운영이 사회적인 경제활동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저와 조직의 전문성으로 수익을 창출하겠다는 심플한 마음으로 회사를 운영했더라면 지금과는 상당히 달랐을 거 같아요. 투자도 하고, 필요한 사람은 더 회사에 영입도 하고요. 지금 새로운 방식으로 2년간 운영하고 보니까 이제야 그런 고민을 실제로 해결해나가고 있습니다. 제가 작년에 60세가 되었는데,. 인생은 60부터라지만,, 좀 더 일찍 NVC를 만나고 상담도 받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 요즘은 NVC가 어떻게 도움이 되나요?
상대방의 이야기 속 욕구를 잘 듣고, 제 욕구와 균형을 맞추어 보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NVC를 몰랐다면, 코칭 상담이 없었다면 노력하는 방향도 몰랐을 거에요.
그런데 NVC를 잘못하면 상대방이 할 말이 없어지기도 해요. 팩트 폭격이 될 수도 있거든요. 그래서 일부러 말을 줄이기도 했는데,, 사실 팩트 자체가 중요하기 보다, 그 안에 있는 욕구를
자기 필터(자칼과 같은) 없이, 바라보는 시각이 중요한데, 자칫하면 아주 건조한 팩트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점도 최근에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 저도 아직 얄미운 단계에 있어요. 상대 공감은 괜찮은데, 내 말을 할 때는 관찰, 느낌, 욕구로 말해도 비난의 에너지가 있어요. 기린 탈을 쓴 자칼인 경우가 많죠. 비폭력대화를 하는 방법은 연습뿐인데, 코칭을 받고 계시니 다행이에요. 내가 공감을 받아야 상대 공감도 할 수 있는 거니까요
얘기하다가 보니, 비폭력대화를 배우러 가는 건 대단한 일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자기 시간과 돈을 들이는 실천적 에너지를 써야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비폭력대화를 배우러 오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특별한 사람들이라는 말을 해주면 좋을 거 같아요. 그리고 이 사회가 변하려면 배우러 오는 사람들이 모두 소통리더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면 좋겠습니다. 너무 너무 어렵겠지만, 일단 방향이라도 그렇게 잡고 계속하면 좋겠어요.
- 맞습니다. CNVC의 비전이 사회를 변화시킬 정도로 비폭력대화를 확산하는 것입니다. 비폭력대화를 하는 사람들이 전 인구의 20% 정도 되면 세상이 바뀔 수 있겠지요? 제가 대표가 되면서 비젼 중 하나로 든 게 비폭력대화 책을 500만부 정도 파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인구의 10%가 비폭력대화를 알았으면 하는 거죠.
험난한 비즈니스 세계의 회사대표로서 비폭력대화 코칭을 통해 삶의 전환점을 만들어 온 김선아대표님. 사업을 접을까 말까 고민하는 시점에 NVC코칭대화를 통해 새로운 삶의 비젼을 찾고, 그것을 매일 매일 실험하면서 새로운 에너지로 충전되어 사는 모습이 아름다웠습니다.
앞으로 10년, 20년 주욱 새로운 비젼을 찾고 도전하며 사는 모습을 기대합니다.
| 인터뷰 : 윤인숙 (한국비폭력대화교육원 공동대표)